산티아고 순례길 D+12(카르데뉴엘라)

Oca 산을 넘어, 바람은 소슬히 불고

by 호변나그네

D+12 (10/20 Mon) Villafranca Montes de Oca - Cardeñuela, 21 km

아침 7시 40분 출발, 비가 올까 걱정 했는데 비는 오지 않아 다행. 바람이 찼다. 내일도 이정도 쌀쌀하면 아내가 넣어준 두툼 장갑을 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베르게를 나서자 마자 산 고개를 향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제일 높은 지점인 모하판 고개 (Alto Mojapan) 가 1,160m 이니 비아프랑카에서 약 300m 를 올라가야 한다.

산길 바람이 차다.


“풍소소혜이수한 (風蕭蕭兮易水寒: 바람은 소슬히 불고 이수는 차다)"

- 이수가 (易水歌: 이수 강가의 노래), 형가 (荊軻)


먼 길을 떠나는 이의 심정이 전해져 온다. 저 산밑에서 부터 산 위쪽으로 세찬 골바람이 올라간다. 꼭 세찬 파도 소리 같다.

옛날 공부암 (空浮庵) 에서의 늦가을이 떠 오른다. 밤새도록 세찬 파도소리 같았던 솔바람 소릴 들으며 To be or not to be 를 고민하던 시절. 이전에 봉집이가 있었던 요사채에 들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한몸에 짊어진것 처럼 고뇌를 거듭하던. 그러나 출구가 극히 제한된 시절의 고민은 깃털 같이 가볍기만 했다.


아무런 답도 없이 하산을 하고 복학을 하고 졸업이란것도 하고 또 취직-결혼 그렇게 귀밋터리만 희어졌다. 그러나 그때 밤새 솔바람 파도소리를 들으며 눈물짓던 내 청년기의 웃목은 지금도 생각하면 쓸쓸하기만 하다.

오르고 또 오른다. 2km 정도 올라가 정상 근처에 가니 해가 어슴프레 올라온다. 이후 부터는 능선 길이다. 두시간 8km 전진, 제법 빠른 진행이다. 산중에서 뜻밖의 푸드트럭을 만났다. 이름하여 Dr. Coffee. 보온병에 담긴 커피가 제법 입에 맞는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을 만났던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발음이 제법 정확하다.


산중에서 귀한 프랑스 가족을 만났다. 젊은 부부에 아이가 여섯이다. 모두 두 살 터울—열둘, 열, 여덟, 여섯, 넷, 그리고 막내 두살. 막내는 아버지가 포대기로 안고 걷고 있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칭얼거릴 법도 한데, 아이들 모두 작은 배낭을 메고 잘도 걷는다. 프랑스 쪽에서 출발해 오늘이 열흘째, 레온(León)까지 걷는다고 하니 앞으로도 열흘은 더 걸어야 한다. 놀라운 가족이다. 네 살짜리 아들에게 아껴 두었던 양갱 하나를 건네며 격려했다.


11시 드디어 오카(Oca) 산을 넘어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그리고 아헤스 (Ages) 까지 걷는 길은 솔잎이 바닥에 푹신하게 쌓여 양탄자를 밟는 느낌. 늦가을 산길의 고즈넉한 정취가 더없이 아름답다.


아헤스에서 잠시 쉬었다가 계속 진행. 12시 40분쯤 오늘의 목적지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 도착했다. 그런데 너무 일찍 도착한 듯. 마을에 있는 3개의 알베르게가 모두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2시’ 혹은 ‘2시 반 개장(Abrimos)’이라는 표지만 덩그러니 걸려 있다. 주민 수 200명 남짓, 마을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한참을 망서리더가 다음 마을로 넘어 가기로 무모한 결심. 6km 떨어져 있는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 (Cardeñuela Riopico) 까지 가기로 했다. 2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아타푸에르카에서 카르데뉴엘라넘어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고 험하다. 만약 내일 새벽 어둠 속에서 이 길을 넘는다면 무척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줄곧 이어지는 오르막, 숨 돌릴 틈 없이 200m를 오르니 정상에 외로운 십자가 하나가 서 있다.


“카르데뉴엘라의 십자가(The Cross of Cardeñuela)” 다.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골고다의 십자가처럼 쓸쓸한 느낌.


차고 매운 바람속 애를 쓴 걸음, 카르데뉴엘라 (Cardeñuela Riopico) 에 오후 3시쯤 도착 알베르게 체크인, 50명 넘게 수용 가능한 곳인데 오늘 묵는 이는 네명 뿐이다. 프랑스인 2명, 스페인인 1명, 그리고 나. 이 중 젊은 프랑스 청년은 영어가 통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영어를 전혀 못해 소통이 쉽지 않다.


저녁을 먹으며 그 청년이 묻는다. “왜 카미노에는 한국인이 이렇게 많으냐”고. 문화권이 다른 동양에서, 이 기독교적 영성이 짙은 순례길을 걷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여가와 여행이 활발한 선진국 중 인구 규모를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느냐고 답했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순례객들은 여가 활동으로 이 길을 걷는 게 아니지. 얼른 화제를 바꾼다.


내일은 부르고스 (Burgos) 다. 인구 18만명의 대도시, 내일은 빨래도 하고 일본식당에서 라멘도 먹을 생각이다.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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