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D+11 (10/19 Sun) Redecilla del Camino - Villafranca Montes de Oca, 24km
레데시야 델 까미노(Redecilla del Camino) 알베르게에서는 간밤에 손님이 단 두 명, 나와 대만에서 왔다는 아줌마, 팜플로나행 버스 시간을 묻는 걸 보니 다시 돌아갈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순례객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듯하다. 순례자 협회에서 나눠준 알베르게 리스트에도 10월 15일 이후 문을 닫는 알베르게가 꽤 된다. 어제 저녁도 다소 부실, 배가 고픈 채로 아침 7시 20분 출발한다
어두운 들판 길을 걷는다. 첫 가리비 표지만 찾으면 그다음부터는 조명과 주의력 문제다. 이젠 요령이 생겨 헤매지 않고 잘도 걷는다.
2km 지점 첫 마을 까스틸델가도(Castildelgado) 통과, 오래된 마을이지만 마을전체가 폐촌처럼 보인다. 4km 지점 두 번째 마을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역시 어둡다. 그리 작지 않은 마을임에도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하다.
여기 스페인도 지방 소멸의 위기가 심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자연을 두고도 농촌을 떠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추세리라.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높고 빛나고 편안한 삶이 모두의 준거 표준이 된 세상. 이처럼 자기 살던 고향을 벗어나 더 큰 도시로 떠난 실향민에는 나도 포함된다.
이제 우리에게 고향은 무엇이 되어버린 걸까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고향 (정지용)
어두운 폐촌을 지나면서 먼 고향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날이 밝고 붉은 아침노을이 온 누리에 가득하다. 오늘까지는 비예보가 없었는데… 역시 오후가 되니 비를 맞고 걸어야 했다. 9시쯤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ío) 도착, 카페에서 차 한잔 그리고 오렌지주스랑 빵을 사서 배낭에 쟁겨놓다. 여기서 니이카타 출신 일본 아가씨 사또꼬를 다시 만났다. 오늘 비야프랑카(Villafranca Montes de Oca)까지 걷는다고 해서 거기서 보겠구나 했다
10시 반, 벨로라도(Belorado) 도착. 인구 2,000명의 비교적 큰 마을인데도 인적이 드물다. 오늘 주일이니 성당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내의 바람에 성당을 찾아갔다. 문은 열려 있으나 안에는 아무도 없다. 홀로 한참을 서서 희미한 초가 밝혀진 제단 그 너머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기도로 성호를 그었다.
이어령 교수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
좀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어령)
다시 길을 잇는다. 간밤 숙소에서 벨로라도까지는 12km, 세 시간 남짓. 별다른 피로를 느끼지 않고 걸었다. 이어 토산토스(Tosantos), 비얌비스티아(Villambistia)까지 7km를 씩씩하게 전진한다.
그러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판초를 꺼내 몸과 배낭을 덮는다. 행동거지가 불편해지고 한기가 스며든다. 맞바람을 뚫고 오르막을 오르는 우중행군이다. 비야프랑카 (Villafranca Montes de Oca = 오카산의 비야프랑카)까지 남은 거리 5km. 오늘 여정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아침의 경쾌한 걸음은 사라지고,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오른쪽 고관절도 저릿저릿 고통을 더한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오른다.
이처럼 인생 중 힘든 시기를 만날 때 - 오늘처럼 비 오고 바람 불고 길마저 험한 때 - 그냥 길만 보며 걸어야 한다. 5km 라면 대충 6,500 걸음, 그 숫자만 하나씩 세며 고갯마루에 닿을 때까지 걷는다. 길섶에서 비를 맞은 들국화가 외롭다.
오후 2시 넘어 오카산 발치에 있는 비야프랑카 도착. 호텔도 있는 알베르게인데 시설이 좋다. 개인 침대, 남녀 분리된 샤워실과 화장실. 15유로. 만족스럽다.
이제 삼분의 일 정도 걸은 것 같다. 시작이 금방이다. 곧 시작이 반이라고 할 때가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