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10(레데시야)

축제는 끝났다. 이제 참된 고행과 순례의 길이 앞에 있다

by 호변나그네

D+10 (10/18 Sat) Azofra - Redecilla del Camino, 26km

알베르게 사람들 아침 일찍부터 부산, 덩달아 나도 여장을 꾸려 7시 반 출발한다, 아직 사위는 깜깜하다. 아소프라(Azofra)가 시골이라 알베르게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들판이다. 헤드랜턴을 켜고 가리비 표시를 찾아 Camino 길로 줄곧 전진한다. 바람이 차갑다.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시나브로 해가 뜬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너른 들판 위로, 여린 황금빛 햇살이 나그네의 눈앞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다. 그야말로 Morning Calm의 아침이다.


첫 마을 시루에냐(Cirueña)까지는 9km.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해발 200m 남짓한 언덕을 넘어야 하지만, 체력이 많이 올라간 덕분인지 비교적 수월하다. 9시 40분쯤 도착. 마을 초입에 Camino에서 정말 보기 드문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보인다. 그때 요깃거리를 조금 챙겨둘 걸—시내에 가면 있겠지 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게 실수였다. 이후 숙박지까지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걷게 된다.


시루에냐는 인구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쉬어 갈 벤치 하나 없어 그대로 통과한다. 다음 마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약 6km. 쉬지 않고 걸어 11시 20분쯤 대성당 광장에 도착했지만, 여기서도 간단히 요기할 가게나 식당을 찾기 어렵다. 여기서 다시 7km 떨어진 그라뇽(Grañón)까지 가면 사정이 나을까?


오후 1시 20분, 그라뇽에 들어섰다. 이곳 수도원 알베르게는 자발적 기부로 운영되며, 특히 한국 순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냥 여기서 쉬었어야 했다…. 그러나 도착 시간이 너무 이르고 체력에도 여유가 있어, 무모하게도 ‘4km만 더’ 가보기로 한다.


그라뇽을 지나자마자 순례길의 중심부 카스티야 이 레온 (Castilla y León) 주로 접어든다. Camino 전체에서 이 카스티야주 구간은 380Km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부르고스 이후의 메세타 구간이 기다려진다


오늘도 길 위에서 사람의 흔적은 드물었다.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 - 산이란 산엔 새들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에 사람 자취 끊어졌구나 - 유종원(柳宗元)“의 산수화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오후 3시쯤, 레데시야 델 카미노(Redecilla del Camino)에 도착. 오는 길도 텅 비어 있고 오늘 체크인한 레데시야의 알베르게도 무척이나 조용하다.


초기 일주일여 같이 걷고 알베르게 앞 바에서 함께 잔을 기울이던 이들은 다 어딜 갔을까. 식사-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뛰우고 길에서는 쉬엄쉬엄 걷던 할배들, 그리고 걷는 것을 즐기던 가벼운 행장의 유럽친구들은 아마 많이 돌아간 듯하고 그 자리를 사생결단 완주를 꿈꾸는 나 같은 심각이 들이 채우고 있는 모양이다


초기의 흥분 기대 호기심은 점차 사라지고 걷는 현실이 남았다. 레스토랑엘 가도 초기의 떠들썩한 분위기 아무나 순례자면 자리에 합석시켜 흥겹게 잔과 대화를 나누던 분위기는 잦아든것 같다.


오히려 혼자서 조용히 와인잔을 기울이든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노트에 끄적거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축제는 끝났다. 이제 참된 고행의 길, 순례의 길이 앞에 있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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