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9(아소프라)

리오하, 노래가 실려 있는 아늑한 대지

by 호변나그네

D+9 (10/17 Fri) Navarrete - Azofra, 22km

일찍 행장을 수습하여 아침 7시 반 Ready to go. 아직 어두운 현관에서 기다리다 프랑스 청년 이안이 나서는 걸 보고 잽싸게 따라 붙였다. 그러나 어두운 시내 골목을 한두 번 돌다 보니 앞선 자취를 놓치고 말았다. 밤눈이 너무 어둡구나! 방향만 가늠해 걷다 보니 불현듯 차가 쌩쌩 달리는 자동차 도로로 나서 있다.

차가 오면 멈추고 또 걷고 30-40분을 걸어 여덟 시 반 정도 되니 조금씩 날이 밝아 부근 길 분간이 된다. 자동차 도로 바로 옆에 생생한 Camino 가 나란히 뻗어 있다. 이런!!! 우리 살면서 눈이 어두워 바로 옆에 안전하고 제대로 된 길을 두고 불안한 위험을 걷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가?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앞에 이안이 걷고 있다.

몸상태가 아주 평온하다. 6km를 수월하게 걸어 첫 마을 벤토사(Ventosa) 9시 반 도착. 카페에서 차 한잔 휴식. 여기 아메리카노는 내겐 거의 에스프레소 수준. 그래도 자꾸 마시니 커피의 진한 풍미가 입에 감겨온다. 유럽 사람들이 물 가득 탄 아메리카노를 질색하는 이유를 알 법도 하다.

여기서 나헤라(Nájera) 까지는 10km,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구간 (Tramo vacío)이다. 길은 평탄한 구릉길. 이상하게도 걷는 내내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텅 빈 구간의 텅 빈 길. 두 시간 반, 10km를 걷는 동안 나를 앞서간 2명만 만나 볼 수 있었다. 사람 없는 길은 좀 외롭다.

에어팟으로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나는 한하운의 싯귀도 외워본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한하운


그러고 보면 “삼포 가는 길” 도 나그네 소설, 이런 길을 걸었던 인생의 길 이야기다. 따뜻한 정감의 인간과 쓸쓸한 주변,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던 시절을 걸었던 그날을 다시 떠올려 본다. 분노의 포도, 겨울 나그네 같은 Road Novel 도 소환하여 괜한 비감에 빠져도 본다.

이렇게 걷다 보면 나헤라 (Najera)도 금방이다. 열한 시 반 시내로 들어섰다. 바위사이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도시 뒤편으로 높은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나헤라 시내에서 잠시 쉰다. 오늘 나바레테부터 걸은 사람은 여기서 숙박하든지 (16km), 아님 6km 더 걸어 아소프라 (Azofra) (22km)까지 가든지. 아무래도 나헤라가 인구 8,500명의 좀 더 큰 대처라 숙박 여건이 좋은 여기서 묵는 사람이 많은 듯.

나는 계속 전진하여 끝없는 황톳길을 걸어 오후 1시 반에 아소프라 도착. 주민수 250명의 아주 작은 마을, 이 마을 하나뿐인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이 좋다. 전부 2인실, 1층 침대다. 샤워를 마치고 바깥 정원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쇄락(灑落)하고 염정(恬靜)해진다.


정말 이곳의 오후 녘은 너무도 아름답다. 흠 없이 반짝이는 햇살, 풍만한 일렁이는 바람, 노래가 실려 있는 듯한 대지의 아늑함. 이대로 몽땅 보자기에 진정 담아가고 싶다.

저녁은 네덜란드 가족 –노부부와 아들-과 함께. 부부는 예순여덟, 40년 넘게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봉직하고 작년에 은퇴 후 아들과 여행 중이라고 한다. 흰 수염이 인상적인 선한 느낌의 노부부다. 내 아내도 선생님이었고 딸도 현직 선생님이라고 하니 아주 반가워한다. 서로 아주 많은 잔을 부딪히며 "선생님" 의 소명을 완수 한 걸 축하해 주었다.


아무래도 선생님들은 뭔가 다른 분위기가 있다 - 선하고 신념이 강하고 다소 융통성 없는. 작년 은퇴하자마자 제일 하고 싶었던 이 Camino를 비로소 걷노라고 하는데, 젊은 아들은 억지로 따라 나온 듯한 눈치다.

귀숙후 아내가 알뜰살뜰 챙겨준 대로 저녁 2알, 아침엔 3알 약을 먹고 발도 주무른다. 참으로 아직 물집하나 잡히지 않은 건 전적으로 현명한 아내의 끼침이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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