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D+8 (10/16 Thu) Viana – Navarrete, 22km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생각보다 가뿐하다. 간밤에 먹은 감기약이 제대로 듣는 듯. 감사한 일이다. 7시 40분쯤 비아나 출발, 오늘 계획은 10km 지점 리오하(La Rioja) 주의 주도 로그로뇨(Logrono)를 거쳐, 다시 12km를 더 걸어 나바레테(Navarrete)에 이르는 것. 대체로 평지 길이니 1시쯤 넘으면 도착할 거로 생각된다
아직 어두운 비아나 시내에서 또 길을 잃었다. 한참 헤매다가 가까스로 Camino로 다시 접어든다
인생길처럼 길에서 실족(失足) 하지 않음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현실적으로 Camino에서 길을 잃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앞사람 조가비가 달린 배낭을 보고 뒤쫓아 가는 길은 대부분은 제길로 가긴 하나 가끔은 낭패가 생긴다. 또한 걸음걸이에 차이가 나면 놓치기 십상이다
가장 확실한 길은 Camino 임을 알려주는 가리비 표지와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가는 일이다. 그러나 어두운 새벽길엔 이 표지를 찾기가 쉽지 않고 또 도시 안에서는 이 표지가 드물어 쉬 길을 잃는다. 구글 맵 (Google Map)을 켜고 길을 확인하긴 하나 효율의 구글은 자주 고행의 Camino와 어긋남이 문제다.
가장 난감한 순간은, 분명 가리비 표지를 따라 걷고 있는데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다. 오늘도 로그로뇨로 향하는 길에서 두 시간 가까이 아무도 만나지 못하자, 스멀스멀 의심이 고개를 든다.
나는 지금 제 길을 가고 있는가? 저 가리비는 누군가 장난 삼아 그려 놓은 게 아닐까? 난 잃어져 버린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과 회의 그리고 외로움. 이처럼 뻔하게 확정된 길 조차 의심하며 자꾸 뒤돌아 보게 되는건 그만큼 인생길 변고가 많았던 탓일까?
비아나에서 6km 정도 진행하면 리오하 (La Rioja) 주로 접어든다. 지금까지 걸어온 나바라 (Navarra) 주는 밀과 보리농사가 주력이라, 가을 추수가 끝나면 눈이 닿는 지평선 끝까지 온통 황금빛이다. 황금빛 들판과 햇살, 그리고 바람—마치 바다처럼 일렁인다. 꼭 다시 보고 싶은 나바라의 풍경이다. 이제 리오하에서는 포도밭이 펼쳐질 것이다.
이 너른 들판의 풍경을 보면서 학창 시절 노래를 흥얼거린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엄마 살아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
콩도 심고 팥도 심고 고구마도 심으련만
소중하고 귀중한 우리 땅은 어디에….”
- 땅, 한돌
우리가 넘어온 그 지독한 가난의 시절, 이 너르고 풍요로운 대지를 마주하니 오히려 맘이 아프다.
리오하 주에 들어서니 풍경이 일변했다. 황금 들판 대신 포도밭이 지천이다. 역시 와인의 고장이다. 언젠가 헤밍웨이처럼 리오하 알타 와인에 새끼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한 잔 기울이고 싶다. 모든 여정이 끝난 자족과 평강의 순간에!
10시 좀 넘어 로그로뇨 도착. 역시 리오하 주의 주도답게 도시에는 활기가 넘친다. 로그로뇨 대성당 옆 플라자의 찻집에서 차 한 잔. 며칠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노르웨이 아가씨와 영국 부부는 여기서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순례길에는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4군데 있는데 이미 지나온 팜플로나 (Navarra 주, 20만 명), 오늘 로그로뇨 (La Rioja 주, 15만 명), 그리고 부르고스 (Castilla y León 주, 18만 명), 레온 (Castilla y León 주, 13만 명) 등이다. 아무래도 버스-열차 노선이 집중된 이런 대도시에서 이별이 흔해진다. 일주일 정도 뒤, 부르고스를 가면 또 정이 들었던 얼굴들이 이 길에서 떠나갈 것이다…
로그로뇨에서 나바레테까지는 12km. 중간에 마을 하나 없이 평평한 구릉이 이어진다. 시내를 빠져나오자 시민 공원이 조성돼 있어, 많은 시민들이 숲길을 걷고 있다. “Buen Camino!”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손을 흔든다. 아주 편안한 정원길이다.
약 4km를 남겨두고 해발 200m 남짓한 고개를 오르는 경사길이 나타난다. 뙤약볕 아래서 헉헉대며 오른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쌓인 탓인지, 역치(閾値)가 꽤 올라간 모양이다. 타박타박, 제법 잘도 넘는다. 고개 아래로 나바레테가 보인다. 순례자 위주의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첫 공립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다. 시골이라 그런지 숙박비는 10유로. 오후 2시에 도착해 씻고, 빨래하고—세탁기는 사흘에 한 번씩 돌리기로 했다—푹 쉬었다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늘 보이던 얼굴들이 점점 사라진다. 그들은 지금 어딜 걷고 있을까.
아주 간단한 저녁, 감기약 두 알 먹고 잠자리 준비.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