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도 신기했던 하루에 대하여
드라마 <도깨비>의 마지막회에서는 은탁의 죽음에 대해 나온다. 죽음의 순간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는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어서 행복했고, 아침식사의 계란 후라이도 예쁘게 잘 익었고, 오늘따라 라디오 방송도 완벽했다고...
돌이켜보니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날 하루의 흐름은 바로 지금을 위한 것이었구나.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이 중요한 순간에 늦지 말라고 말이다.
생사를 거론할 정도로 거창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참 이상하고도 신기했다고 느꼈던 하루가 있었다. 그 희한했던 날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나는 전형적인 집순이다. 외출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뭘 사야 한다거나 누구를 만나야 한다거나 하는 목적이 없으면 어지간해서는 잘 안 나가는 편이다. 남들은 날씨가 좋으면 그냥 산책이라도 나간다던데 나는 혼자서는 잘 안 나가게 된다. 막상 나가면 나름대로 잘 즐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한번 나갈 때 이런저런 볼일을 몰아서 보곤 한다. 예를 들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본다던가 하는 일이 가장 흔하다.
지난 금요일에도 그런 다목적 외출을 할 계획이었다. 인사동에서 최애 작가가 전시를 하고 있었고, 마침 금요일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인사동에 갔다가, 종로 나가는 김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당일이 되자 그놈의 게으름이 발목을 잡았다. 7시가 좀 넘어서 눈을 뜨기는 했지만 이틀째 잠을 잘 못 잤다는 이유로 침대에서 밍기적댔던 것이다. 그렇다고 개운하게 더 잘 잔 것도 아니었다. 기껏 다시 누웠지만 이상한 꿈 속을 헤매며 선잠을 잔 터라 안 자느니만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썼다. 그 와중에도 오늘 말고 주말에 외출하는 걸로 미룰까도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미적미적 일어나서 씻고, 밥을 챙겨먹은 후 집을 나오고 나니 정오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중천에 뜬 해가 참 눈부셨다.
'아... 오늘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한번 누우면 예약된 후회를 맞이하리란걸 뻔히 알면서도 또 그런 나 자신을 게으르다며 미워했다.
원래 생각했던 일정은 집 근처 도서관을 들르는게 마지막이었지만, 살짝 바꿔서 제일 먼저 가는 걸로 바꿨다. 책을 반납한 후 인사동에 가는 버스를 검색하니 도착하기까지 1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나와있었다. 그 다음 버스는 11분 후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뛰기 싫어서 '1분 남은 버스 놓치면 다음 꺼 타지, 뭐' 이런 마음으로 태평하게 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전을 이미 날린 터라 그냥 좀 뛰어서 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숨차게 뛰었던 덕분인지 곧바로 도착한 버스를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사실 인사동에서 하는 최애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가는 건 두 번째였다. 일주일 전에 갔을 때는 토요일이었는데, 경복궁 부근에서 한참 길이 막혀 버스 안에서 거의 20~30여분을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아침에 침대 안에서 밍기적대다가 겨우 일어난 이유도 또 그런 상황을 맞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지도 앱을 보니 가는 경로가 지난번과 반대였다. 저번에는 집에서 바로 출발해서 낙원상가 방향에서 내린 후 갔는데, 이날은 종로 2가에서 내려서 가는 방향이었다. 버스에서 하차 후 지도 앱을 계속 보면서 걸었다.
한때는 종로를 자주 다닌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벌써 십여년이 훨씬 넘었다. 인사동은 더더욱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는 길이 낯설었다.
오른쪽에는 무언가 공사 중인지 커다란 펜스로 가려져 있었고, 왼쪽에는 몇십년은 된 듯한 술집들이 즐비했다. 오래된 간판과 어둑한 창문 너머의 실내는 지금도 장사를 하는 건지, 아직 영업 시간이 아니어서 닫아둔 건지 알 수 없어 보였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골목이 갑자기 대폭 좁아졌다. 여기를 지나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한 사람의 폭만큼 매우 비좁아서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런 골목을 나온 후에는 중간에 두 번 정도 길을 잘못 들었다. 여기로 가는 건가 싶어서 나갔다가, 지도 앱을 보고 여기가 아니라 저기인가, 하며 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렇게 길을 헤매는 상황은 무척 싫어하는 순간이다. 특히 공연이나 영화 관람처럼 특정 시간을 맞춰야 한다거나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 같은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도 앱을 보고도 왜 못 찾냐고 묻는 사람을 보면 마음 속으로는 가끔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걸 보고도 못 찾는 나는 얼마나 답답하겠냐고!'
그래서 길을 헤맬 때는 스스로에게 괜한 짜증뿐만 아니라 화까지 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랬는지 짜증은커녕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라면 오지 못했을, 몰랐을만한 곳들을 지나치고, 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그러면서 지금의 내가 이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미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방향이지만 그 과정에서 뜻밖의 재미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과도 닮았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이 바로 '이게 맞아?' '나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맞나?' 이다. 처음 보는 골목길들을 지나고 잠시동안 헤매면서 지금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잘한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려 했지만 한동안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우물 안에 고여 있는 건가 싶어서 다른 곳을 기웃기웃거렸다. 이상만 좇은 탓에 현실의 나는 퍽 쓸모없게 여겨졌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가뜩이나 작은 마음이 자꾸 구겨지고 쪼그라들었다.
어느 날엔가 누군가가 내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보면 나도 괜찮은 구석이 있는데 단지 내가 잘 못 볼 뿐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힘입어 다시 고개를 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어깨도 으쓱해보고, 기지개도 켜봤지만, 현실은 역시나 녹록치 않아서 때때로 이 방향이 맞는 걸까,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하고 넋 놓고 있는 순간이 잦아졌다.
골목길을 헤매면서 문득 지금의 그런 내가 떠오르며 겹쳐진 것이다.
그렇게 길을 잘못 들었지만 다행히 오래지않아 돌아 나와서 갤러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이어서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비록 헤매기는 했지만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곳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아까 본 한 사람의 폭만큼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거기를 통과하고 조금만 길을 잘 찾아나가면 더 넓은 길, 탁 트인 광장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오늘 하루 이렇게 낙관적으로 기운을 내다가도 얼마 후면 다시 울상을 지으며 축 처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관된 비관보다는 이게 좀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가면 같은 긍정일지라도 한 톨 만큼의 기대도 없는 삶이란 너무 팍팍하지 않은가...
갤러리에 도착하니 티켓을 받아주시는 분이 위층에 작가님이 와 계신다면서 잠시 후 독자들과 운현궁 산책을 가실 거라는 정보를 알려주셨다. 안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 그랬는지 더욱 더 뜻밖의 기쁜 소식이었다.
덕분에 사인도 받고, 얼굴 도장도 찍고, 운현궁 단체 산책도 함께 했다.
그런 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음에 올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왕 온 김에 그냥 보고 가자 싶어서 대기열에 합류했다.
줄을 서면서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지인이 내가 보려는 전시 사진을 스토리에 올린 것이 보였다. 불과 4분 전이었다. 놀라움에 카톡을 보냈더니 지인 역시 아직 근처라면서 반가워했다. 얼마 후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눌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늘은 참 신기하고도 이상한 우연이 겹치는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눕고도 일어나지 못하고 일정을 주말로 미뤘다면 어땠을까?
내가 예정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움직였다면 어땠을까?
도서관에 들르는 일정을 예정대로 마지막으로 뒀다면 어땠을까?
도서관에서 나온 후 뛰지 않고 1분 후 오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작가님도 못 만나고, 미술관에서 지인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 일정을 바꿨다면 종로 2가에서 내리지 않았을테니 골목길의 경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도 그날 하루가 신기하기만 하다. 혼자서는 좀처럼 잘 나다니지 않는 나를 위한 선물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매번 게으르다며 스스로를 미워하는 나에게 안 그래도 된다고 누군가 만들어준 하루 같았다.
여전히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거고, 나를 미워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오늘을 떠올리며 그런 날도 있었지, 혼자 다니는 것도 즐거울 때가 있지, 가끔은 흘러가는대로 둬보자 하며 한숨 돌릴 날도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