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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아토르 Aug 14. 2022

나무가 만든 하늘길

 나는 몇 번이나 진로를 변경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나에게는 너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해야만 하는 일들이 모두 있었고. 어쩌면 운이 좋게도 나는 그것들을 모두 한 번 씩은 해볼 수 있었다. 졸업 후 4년이 지난 스물여덟에서야 정착할 만한 길을 찾아 4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스물여덟이 늦은 나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누군가에 눈에는 방황으로 보일 4년이 내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두는 것보다 한 번 가보고 돌아서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니까. 스물여덟은 스물여덟 일 때나 많아 보이는 나이이지, 서른 하나가 된 지금 돌아보기에는 여전히 도전했어도 충분한 나이이다. 앞으로의 나는 과거의 나를 더 그렇게 볼 테고 말이다. 방황의 4년도 그때는 언제나 좌절하고 비관하며 그만둔 길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4년 덕분에 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때 좀 더 용감하고, 좀 덜 기대한다. 다만 내가 나로서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 데에 능숙해졌다.


지금의 길도 나는 언제나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류시화 시인이 내 이런 방랑벽에 위안이 되어주는 글을 쓴 바 있다.


  "방황한다고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고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그 많은 우회로와 막다른 길과 무너뜨린 과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길을 걷다가 그 길을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떠나도 괜찮다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자라고 말이다.


 끝없이 여행을 할 것이다. 비단 진로뿐만이 아니라 내 삶에서 끊임없이 여행하고 싶다.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싶다.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 테다. "What am I" 대신 "Who am I"를 채우는 일들에 집중하고 싶다. 나무, 숲, 산책, 글, 문학, 드라마, 영화,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 절, 하늘, 커피, 음악, 고요, 공원, 자전거, 사진, 여행, 제주 바다,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 그런 것들을 찾아 나서며 내 취향을 채운다.


며칠 전 갑자기 찾은 서울숲에서는 문득 이런 생각도 했다. 생활과 삶을 반복하며 사는 것 같다고. 내 취향을 채우는 일들을 하고 있을 때 나는 "Who am I"를 채우며 삶을 산다. 서울숲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이,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이, 내 눈을 꽉 채운 나무와 숲과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그렇다. 그런 순간은 삶에서 몇 안된다. "What am I"로 살아야 하는, 사회인으로, 일 인분의 몫을 해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나날들이 더 길기 때문이다. 서울숲도 근 1년 만에 찾은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순간 1년 전의 나와 꼭 겹쳐졌다. 마음이 충만해지는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푸름과 파랑, 햇볕과 바람, 웃음소리와 새소리, 그런 모든 감각이 어떠한 거슬림도 없는 순간에 감사했다. 그런 순간은 인생에서 '점'처럼 존재하고, 그런 것을 그리워하는 생활은 '선'처럼 존재한다. 예전에는 언제나 충만한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일이 많고 힘들 때엔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바쁜 일상 속에 짬을 내어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지켜내는 순간들은 내가 생활인으로서 열심히 살 때 더 소중하고 가치롭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사실은 지금의 나를 만든 모든 순간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며, 지금의 내게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건 유무형을 가리지 않는 추억이다. 내가 여전히 그리워하는 여행지의 일몰과 바람, 시원한 맥주도. 내가 떠나왔으나 조금은 그립고, 많이 고마운 과거의 일터도. 무엇보다 그때는 너무도 서툴러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언제나 최선을 다해 길을 걸어온 과거의 나 자신도 말이다.

서울숲을 올려다보니 나무들이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은 채 하늘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인생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나무를 심는다. 그것이 어떤 그늘을 가진 나무가 될지는 커봐야 아는 일이다. 내가 지나온 모든 경험들도, 내가 쌓아온 모든 순간들도, 내가 만들어온 나의 취향들도 그때마다의 최선이었다. 그 최선이 만들어낸 하늘길을 내가 걷고 있다. 나는 다음 나무를 또 심으려 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 나무의 그늘이, 돌아보았을 때 나의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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