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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조 Oct 24. 2019

책 읽으러 떠납니다

여행하는 책읽기 #0



나와 미국에 다녀온 책들


여행을 떠나기 전, 비행기 표와 숙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여행 가방에 챙길 책을 고르는 일이다.


나는 이북으론 책을 잘 보지 않는 극단적인 종이책 애호가이기 때문에 여행을 갈 때면 한껏 까다로워진다. 얼마나 두꺼운 책을 몇권이나 가져가느냐가 여행가방의 무게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많이 챙길 수도 없으니 당연 책 고르기에 까다로워질 수 밖에. 그러나 늘 추리고 추려도 너댓권의 책들이 가방 한켠을 묵직하게 차지한다. 책이 먼저 들어가 떡하니 자리를 잡은 여행가방을 들여다보며 엄마는 ‘너 여행가는 게 아니라 책 읽으러가니?’라며 타박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언젠가부턴 읽기 위해 떠나는 것 같다. 여행가는 도시, 계절, 날씨에 걸맞는 책을 세심하게 골라 가져가서 여행지에서 다 읽고 돌아오면 그 책은 내 여행일기나 다름없게 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뒤, 책을 다시 꺼내 펼치면 책장 사이에 여행의 기억들이 갈피갈피 꽂혀있는 것만 같다. 런던의 때아닌 쨍한 햇살, 리버풀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빗줄기, 뉴욕의 바둑판처럼 정갈한 길들, 베트남에서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커피같은 것들이 다 책장 사이에 곱게 간직되어있다. 


기껏 비싼 돈 내고 가서 책장에만 코를 박고 있으면 뭐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애당초 나는 거의 혼자 여행을 가는 편이라 더 그렇기도 한데, 여행지에선 정말 지루해 죽겠는 순간들이 꽤 많다.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머나먼 타지까지 갔으니 이것저것 보고 구경해야한다고들 하지만, 여행의 모든 순간이 만족스럽게 흥미로운 건 아니다. 네트워크조차 속터지게 드문드문 잡히는 뉴욕 지하철 안에 앉아있을 때, 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며 사람들 틈에 끼어 줄을 설 때, 기차나 비행기의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있을 때 등등, 환장하도록 심심한 순간들은 끝도 없이 많다. 그럴 때면 네트워크도 배터리도 필요없는 책은 꽤 괜찮은 선택이다. 책을 무겁게 들고다녀야 한다는 번거로움만 빼면 책읽기는 어디서나 시간때우기 좋은 활동이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밀려오는 성취감이란. 일단 한 번 느끼고 나면 중독될 수 밖에 없다. 여행지에서까지 성취감을 찾는 것이 웃기긴 해도, 이런 종류의 만족감은 살아가면서 종종 필요한 것 같다. 나의 오랜 친구는 양장본을 여행에 들고갈까말까 고민하는 나에게 엄청나게 현명한 대답을 해주었다. 


여행에 양장본을 들고가서 다 읽으면 그건 업적이 된다.



친구의 말대로 여행지에서 책 읽기는 내겐 작은 업적들로 남는다. 


여태까지 가본 곳들, 가서 읽은 책들보다 더 많은 도시를 가보고 더 많은 책들을 읽게 될거라는 기대가 나를 늘 설레게 한다. 여행이 세계를 넓게 보도록 한다면 책은 세계를 더 깊게 보도록 한다. 그러니 팔이 빠지도록 무거운 여행가방을 매번 낑낑대며 들고 가야 한다고 해도, 책을 챙기는 일을 멈출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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