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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Mar 09. 2021

'철'보다 차갑고 단단한 세상과 '빛'

영화 「빛과 철」



'철'보다 차갑고 단단한 세상과 부딪히는 그들에게 과연 '빛'은 있는가?



[피해자와 가해자]

영화 「빛과 철」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극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사고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주제가 최근 개봉했던 영화 「세자매」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분명하게 다른 종류의 것이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두 남자는 다른 이유로 말을 할 수 없어 침묵 속에 있고, 사고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두 여자는 서로를 가해자라 의심하고 미워하며 가책을 떠넘기며 고통 속에 산다. 주인공이 되는 여자 둘은 어떻게든 무엇이든 누군가에게든 보상을 얻어내고 싶은 모습으로 비친다.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힘겨워 보이는 희주와 영남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마저 힘이 들게 한다. 어둠과 절망 속에서 고통은 반복되고, 희망은 고갈되었다. 숨이 붙어 있는 남편과 아직 어린 딸을 위해 억지로 버티고 있는 영남에게도, 가해자의 가족이며 과부가 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남은 힘을 쥐어짜는 희주에게도 빛은 내려앉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책임과 고통을 여자들에게 떠넘긴 남자들의 형편이 훨씬 나아 보인다. 무책임한 사람들이 평안을 찾은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시나리오]

영화를 보는 내내 시나리오에 많은 공을 들였음을 느꼈다. 반전의 반전의 반전. 흔하지 않은 반전의 연속을 통해 신선함과 충격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야기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뛰어난 완급 조절을 보여준다.

사실 희주가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는 영남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뛰어가는 장면을 보자마자, 첫 번째 반전을 눈치챘다. 그러나 지금은 가해자로 설정된 희주 부부가 실은 피해자였을 것이라는 나의 눈치 빠른 예상은 영화의 중반부까지만 유효했다. 서로에게 죄를 미루며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두 여자 모두가 실질적인 피해자이며, 그들이 그렇게 감싸고돌던 두 남자 모두가 가해자라는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반전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희주가 정신과 의원을 올려다보며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며 주저하던 이유는 신체적 이상이 없음에도 자꾸만 이명이 들려 고통스러운 본인의 증상을 상담하고 치료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남편의 상담 내역이 궁금해서라는 점, 남편의 죽음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유독 힘들어하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남편을 끔찍이 사랑했으며 금슬 좋은 부부였을 것이라 여겨지던 희주가 사실은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 소송을 준비 중이었다는 점,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던 영남의 남편은 사고 이전부터 큰 부상으로 인해 와상이었다는 점, 아빠가 이불속에서 칼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는 은영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영남의 남편은 자살을 시도하려 했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고 보상받고 싶어 했으며 가족들을 위해 고통을 참으며 운전대를 잡았다는 점, 영남의 남편이 자살을 결심한 것은 공장 사장의 말을 들은 이후라는 점.

큰 줄기를 차지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반전 이외에도 첨예하게 짜 놓은 반전들은 이 영화를 빛나게 한다. 한국 영화 중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만난 것은 '기생충' 이후로 처음이다.




[연출]

영화 「빛과 철」을 보며 자꾸만 영화 「세자매」가 생각났다. 암울한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이 묘하게 닮아 있다. 인물에 초점을 두고 명암으로 자아낸 분위기를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 특히 그렇다. 어두운 현실을 제시한다는 주제 또한 같다. 여자들이 (그것도 세명이) 주인공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빛과 철」이 더 많이 아쉽다.

지나친 반복과 느린 전개로 관객을 지치게 만드는 부족한 연출은 배우들의 연기까지 완벽하게 살리지 못했다. 클라이맥스 없이 불행과 고통만을 나열하다, 그렇게 문득 끝이 난다. 풀어놓은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통해 감독은 무엇을 시사하고자 하는가? 자꾸만 등장하는 고라니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고 현장에 죽어 있던 고라니는 죽음을 바라고 맞이한 혹은 목전에 둔 남자들을 뜻하는가, 마지막에 등장하여 여자들이 죽일뻔했지만 살아남은 고라니는 위기를 눈앞에서 경험한 여자들을 뜻하는가? 영남의 남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리는 차 안에서 영남을 노려보는 희주를 보며, 영남을 죽이려는 것이구나, 했는데 고라니가 튀어나온 뒤 분위기가 급변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한 대 맞은 정신을 가다듬으면 문득 둘은 적이 아니라 동지였음을 깨닫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서로를 발견한다. 그게 다 (CG인 게 분명한데 귀엽기도 한) 고라니 덕분인가?


그래서 은영은 어디로 갔는가?




영화 제목은 왜 '빛과 철'일까? 철공장이 배경이고, 단단하고 차가운 철에 세상을 비유한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여 '철'을 이해해 보지만, '빛'을 선택한 이유는 의문이다. 이 영화에는 빛이 없다. 유일한 빛은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가로등과 공장과 식당 밖을 비추는 햇빛, 영남이 공장에 저지른 불 정도다. '빛'이 없어서 '빛'을 넣은 것일까 생각도 해본다. 차라리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Black light' 즉, '검은빛'이 이 영화와 더 부합하는 듯하다.


그래서 창밖을 바라보며 자살할 것만 같던 은영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

우울과 무기력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김시은 배우의 연기는 분명 주목할만하다. 언젠가 어떤 영화에선가 보아 왔던 얼굴이지만 주목할 만한 정도는 아니어서 가물가물했던 그녀의 존재감은 이 영화를 통해 뚜렷해진다. 힘이 없어 보임에도 끈질기며, 쓰러질 듯 보임에도 악바리처럼 꿋꿋이 버틴다. 순해 보이는 인상의 얼굴 위로 신경질적인 표정이 지나가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인 염혜란 배우는 그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햇빛에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악역인 양 등장했다가, 하얀 영양사 가운을 입고 친절한 미소를 띠며 다시 등장하는 그녀는 앞으로 이 영화가 보여줄 이야기를 집약하는 듯하다. 방화를 저지른 공장의 화마를 배경으로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여 논길을 걸어 나오는 염혜란 배우의 모습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영화  「벌새」에서 차분하지만 우울함이 섞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박지후 배우는 이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유독 짙게 그린 언더라인은 은영이 느끼는 절망감을 증폭시키는 의도였을지 모르지만 거슬렸고, 변화 없는 표정으로 일관하며 만들어낸 분위기는 오히려 딱딱하기만 했다. 좋은 마스크를 가진 박지후 배우의 이미지가 이렇게 고정되어버릴까 작은 우려가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은영은 어디로 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도 없이」를 시작으로,  「세자매」에 이은, 「빛과 철」까지,

올해 한국 영화의 시작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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