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가 주는 향기와 기억
월화수목금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회사 지하주차장으로 오가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늘 그날이 그날이다. 그러다 얼마 전 퇴근길, 이마트에서 올해 처음 냉이나물을 발견했을 때 알았다. 아, 이제 지겹도록 추운 겨울도 곧 가겠구나. 봄이 오고 있구나.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 고마운 나물 한 팩을 집어왔다. 남편이 오늘 저녁시간에 맞춰 모처럼 일찍 들어오고, 딸아이 학원도 일찍 끝나는 날이니 다 같이 앉아 먹는 저녁이 되겠군. 그럼 오늘은 냉이바지락솥밥을 지어볼까. 먼저 흙이 묻은 냉이를 살살 털어 깨끗이 씻고, 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다. 데쳐낸 물을 개수대에 버리면서 뜨거운 김과 함께 훅 올라오는 냉이 향기. 밥이 아니라 봄을 짓는 느낌이다. 향기로 기억되는 추억, 그 쌉싸름하면서도 독자적인 특유의 향기는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한다.
어릴 때, 정월대보름이면 할머니는 내 눈에 모두 똑같아 보이는 나물무침들을 종류별로 끝없이 생산해 내신다음, 팥과 잡곡들이 잔뜩 들어간 오곡밥이랑 같이 내어주셨다. 어린 눈에는 거칠고 거무튀튀한 밥에 마찬가지로 칙칙해 보이는 각종 나물들이 올라간 밥상이 버거운 숙제처럼 느껴졌고, 다른 반찬을 찾는 내게 싫어도 올해 복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먹으라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많은 나물들 중에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냉이나물무침. 할머니표 고추장 된장 조금씩 넣고 달콤 쌉싸름하게 무친 나물은 그 특유의 향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는 항상 그것만 먹었었고, 그걸 아시고 언제나 냉이 나물을 듬뿍 식탁에 올려주시던 할머니 덕에 나는 냉이나물을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이제야 나는 그때 그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 알겠다. 매일 똑같이 느껴지는 평범하고 소소한 하루가 언제나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것이야말로 언제든지 쉽게 와장창 깨어질 수 있는 예쁜 유리병 같은 행복임을 알게 되면, 각종 세시풍속과 미신이 진짜든 가짜든 그걸 핑계 삼아서라도 내 소중한 사람들의 무탈함을 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귀찮지도 않나,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을 하는 건지 그때는 당최 알 수가 없었는데, 나물을 불리고, 밥을 짓는 그 모든 시간이 나의 귀한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몸으로 해내는 마음이었고, 의식이었고, 기도였음을.
나도 요즘 밥을 하면서 자주 비슷한 마음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춘기 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이게 아닐까. 마음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해도 엇나가는 말, 나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간섭하고 싶은 수많은 마음들도 잠시 내려놓고, 쑥쑥 자라는 키로도 가고 기왕이면 충만한 마음으로도 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밥을 짓는다. 먼 훗날 딸에게 기억될 봄의 맛이 조금은 더 따뜻하고 향기로워지길 바라면서 그렇게 오늘도 퇴근길에 마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