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성에 도착하자 후작은 시몬느에게 손을 내밀며 성안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의 손을 잡고 살포시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그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참, 그전에 그녀의 용모와 분위기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한다.
그녀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늘 두 눈엔 왕성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눈빛이 살아 숨 쉬고 있었고,
동시에 뭔가에 꽂히면 물불을 안 가리는, 뭐랄까?
많이 정열적이라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 이성보단 감정이 우세한 듯 보이는, 뭐 그런 느낌이기도 했다.
또한, 천성이 밝고 담대한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경솔하지만은 않은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겉으로 보기엔 감성에 치우칠 것 같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인 후작을 따라가 제일 먼저 보게 된 건 바로 그의 서재였는데,
그곳엔 실로 어마 무시한 분량의 책들이 일사불란 정렬돼 있었다.
그리고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격조 넘치는 커다란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족히 20개가 넘는 의자가 그 주위에 둘러져 있었다.
후작이 그중 의자 하나를 당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편히 앉도록.”
“네...”
그녀는 그의 말에 따라 의자에 앉았고, 후작도 바로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바라봤고, 후작은 그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집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차 드실 시간이라고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은 그에게 다과를 주문했다.
그들은 다과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후작은 시몬느가 왕비의 시종이 된 사연을 제일 먼저 듣고 싶어 했다.
“왕비께서 고향인 쉐르나 왕국에서 오실 때 함께 온 시종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만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지 뭐겠어요.
그래서 급히 시종을 구하셨는데, 절 아는 먼 친척분이 절 천거해 주셨지요.”
“오~ 그럼 네 부모는 어떤 분이시지?”
“제 아버지는 상인으로 돈을 열심히 모은 분이시고,
제 어머니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두 분이 로맨틱한 사랑으로 결혼하신 건 아니지만,
저나 제 여동생은 나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래? 그럼 네 가족이 너를 무척 그리워하겠구나!
못 본 지 꽤 됐을 테지?”
그때 집사가 다과를 내왔고, 후작은 그녀에게 다과를 권했다.
“네. 가족들, 그중에서도 여동생인 엠마가 제일 그립지만 괜찮습니다.
이미 각오한 일인걸요.”
그녈 기특하게 바라보던 후작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뗐다.
“너의 당돌함이 맘에 들었고, 뭔가 네게서 특별한 기운을 느껴 널 데려오긴 했다만,
아직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구나!”
이상하게 시몬느는 후작의 그 말에서 희망을 느꼈고, 그런 그의 말에 신뢰가 갔다.
그리고 여기선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럼, 후작님께서 제게 일을 주시기 전에 여기 있는 책들을 좀 읽어도 될까요?”
기쁜 표정을 지으며 후작이 말했다.
“물론이지! 난 책 읽는 사람을 좋아한단다.
그래서 이렇게 넓은 테이블과 많은 의자를 만들었지. 책을 읽고 토의하길 즐겨서.
물론 이곳에서 책이 아닌 다른 문제를 다루는 모임을 주최하기도 하지만.”
“아! 네...”
“물론 자격이 된다면 너도 우리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단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게 뭔데요?”
“이곳에서 있었던 일, 나눴던 이야길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본격적으로 참석하기 전에 우선은 참관해 보는 게 순서란 말도 덧붙여야겠군.”
그녀는 당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생각도 않고 무조건 이렇게 답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대단한 영광일 거 같습니다.”
그리고 후작이 자릴 뜨자 그녀는 즉시 책 읽기에 몰두했다.
책 읽기에 몰두하던 그녀는 졸음이 오기 시작해 자신도 모르게 그만 탁자 위에 머리를 대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웬 방에 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앞으로 자신이 묵을 방 같았다.
옷은 입은 채 그대로였고, 대신 신발은 벗기어져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순간 살던 곳에서 멀리 왔다는 깨달음과 함께 모든 게 현실감을 잃은 채 깊은 외로움이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신발을 찾아 신으려던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계집종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후작의 전갈을 전했다.
“후작님께서 아래층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알았다고 답하곤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소박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후작은 그녀를 반기며 이번에도 또 친히 의자를 빼주었다.
이런 대접을 받는 건 첨이라 기분이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상념에 사로잡히게 된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린 후작이 그녀를 다독였다.
“멀리서 오기도 했지만, 저녁 무렵이 되니 더욱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겠지?”
“...”
“하지만 곧 나아질 거야. 사람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거든. 뭐가 됐든 곧잘 망각하는.
게다가 여기서 살다 보면 곧 모든 게 익숙해지고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야.”
“네. 저도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아주 많이 슬플 거 같거든요.”
“그렇지. 사람이 대개는 그러니까. 참, 그런데 내가 네 이름을 불어봤던가?”
“아뇨. 그렇지 않아도 참 늦게도 물어보시는구나 했었죠.
제 이름은 시몬느입니다.”
“시몬느! 참 지적인 이름이군. 맘에 들어. 자 그럼 우리 식사 시작할까?”
“네.”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카모마일을 넣은 수프가 좋다고 해서 특별히 그걸 만들라고 했지.
그리고 송아지고기에 당근과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이라고 했고.
다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지.”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들은 식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좋아하는 계절과 좋아하는 일에 관해 물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했다.
또 이 세상의 가치와 상충하는 일이 발생할 때 그녀 같으면 어떻게 해결하겠는지에 관한 질문 같은 것도 던졌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는 질문들이긴 했지만, 그분의 취향이 뭐 그런가 보다 하고 그녀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다 보니 밤이 깊어졌고, 그렇게 첫날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르망 후작이 그녀에게 함께 사냥하길 청했다.
딱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흔쾌히 그를 따라나섰다.
후작은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그들의 사냥을 보필할 매부리들을 대동하고 숲으로 향했다.
숲은 그야말로 고요함 그 자체였다.
이런 숲에 크고 작은 동물들이 거주하면서 서로 먹고 먹히고를 반복하고 있다는 게,
그러면서도 평화롭고도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이런 생각을 읽은 듯 후작은 그녀에게 자기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아니지 어찌 보면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지만,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면서 숨은 그림을 찾는 셈이지. 운명에 맞서고 때론 운명에 순응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후작님께서는 제 생각을 그렇게 자주 읽으시는 거죠?
제 얼굴에 제 생각이 쓰여 있기라도 한 건가요?”
“하하~ 그럴 리가~”
“안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을 좀 살다 보면 보이는 게 있어.
물론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아! 저도 좀 더 살다 보면 보이는 게 있을까요?
그리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요?”
“다 그렇게 되는 건 물론 아니야!
하지만 지금까지 널 봤을 때 넌 충분히 그리될 소질이 있는 듯해. 그게 널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기도 하고.”
후작의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다소 헷갈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후작의 말이 그녀는 칭찬 같단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두 사람은 사냥으로 거의 온종일을 숲에서 보냈고, 지친 몸으로 성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도 후작과 시몬느는 자분자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이번에는 후작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줬다.
그는 모든 종류의 책을 좋아하고 있었고,
신학에서부터 시학과 수사학은 물론, 지도자층이 되기 위한 고대 작가들의 모든 책을 섭렵했고,
특히 그들 중 세네카와 오비디우스를 흠모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자신이 글을 쓰는 것도 즐긴다고 덧붙였다.
시몬느는 성에서 후작과 보내는 시간이 진정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새로웠고, 하루하루가 신비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