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할리페' 3

3화 <특별한 사람들>

by 꿈꾸는 노마드

함께 살면서 시몬느가 보기에 후작이 지닌 장점은 너무도 많았다.

그중 무엇보다 그녀의 맘을 사로잡았던 건 그가 그녀에게 세네카의 명언 중

<종교는 일반인에게는 진리이고, 현자에게는 거짓이며, 권력자에게는 유용하다>

를 인용하며 그의 종교론을 펼쳤을 때였다.


“그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가나?”

“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왜 종교란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많은 이가 죽어야 하는 건지 과연 그런 게 신의 뜻일까 라는 생각을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진정한 신앙인은 종교를 빙자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지.

생각 없는 이들을 종교란 이름으로 선동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게 바로 권력자들의 모습이야.

이런 그들에게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 생각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한 거고.”

“네.”

“교회도 바뀌어야 해.

사유재산을 늘리고, 계급을 나누고, 신을 빙자해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절대 옳은 일이 아니니까.”


종교의 가식과 허위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시몬느에게 그의 일갈은 통쾌함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흘렀고, 거짓말같이 그녀는 그곳의 생활에 적응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시몬느는 후작에게 지나가는 말로 자신이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야길 하게 됐다.

그녀의 말을 들은 그의 눈이 빛났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었군!”


그가 읊조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후작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후작이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 모임이 있는데 한 번 참관해 보겠나?”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후작과 함께 서재로 갔다.

그들이 거기 도착하고 잠시 후 낯선 이들이 그곳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와 후작을 포함한 22개의 의자가 다 채워지자 두꺼운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서재의 문이 굳게 닫혔다.

잠시 후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먼저 여기 계신 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이 모임을 만든 사람의 권한으로 오늘 우리 모임을 참관할 수 있는 분을 한 분 모셨습니다.”


여러 개의 눈이 시몬느를 향하긴 했지만,

그들은 별로 그녀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 사이엔 어떤 유사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 제각각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처럼 겉모양도, 분위기도, 제각각이었다.

보기에 따라 지위도, 신분도 달라 보이는 남녀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후작이 그들 앞에서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높고 낮음 없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도덕성과 합리성을 갖추고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를 도우시는 절대자시여!

오늘도 우리는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참가자 모두의 눈빛이 혁혁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시몬느는 목도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눈빛이 서로에게 깊이 다가가 소통하는 듯 보였다.

갑자기 그들 중 눈을 감는 자들이 보였고, 뒤이어 쓰러지는 자들이 보였다.

후작은 늘 보던 광경이라는 듯 느긋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영문을 모르기에 두려움에 떨었다.

잠시 후 후작이 그녀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낮게 읊조렸다.


“심신을 정화하는 과정이야. 두려워할 거 없네.”


정신을 잃은 듯 보였던 자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옷매무시를 다듬은 다음 단정히 앉았다.

다음으로 그들이 함께한 것은 각자 앞에 놓인 노트에 뭔가를 적는 일이었다.

뭔가 신들린 듯 그들은 한참 써 내려갔다.

그리고 가끔 눈을 감고 집중하는 모습도 보이면서 계속 썼다.

그런 행위가 끝나고 그들은 휴식을 취하듯 각기 편안한 자세로 앉아 담소를 나눴다.

그녀의 눈엔 그저 신비롭고 신기한 행위였다.

그날 그녀는 그렇게 그들의 의식에 처음 참관할 수 있었고,

이후로도 몇 번 더 참관이 이어졌다.

시몬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몇 번 더 관찰할 수 있었고,

서서히 그들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고도 그녀가 그들의 비밀을 제대로 알게 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녀가 성에 도착하고 근 석 달이 다 되어가도록 다르망 후작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로 책을 읽고, 산책하고, 가끔 그와 사냥을 나가는 게 일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작이 야외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석 달이 다 되어가는군. 그렇지?”

“네. 세월이 너무 빨라 이제 겨우 삼 주 정도 된 듯 느껴진답니다.”

“그 얘긴 이곳에서의 생활이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들리네만, 그런가?”

“아무렴요. 지루하긴커녕 하루하루가 새로웠답니다.

배운 것도 많고요.”

“그렇다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말이군.

내 성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건.”

“후작님께서 흠모하신다는 세네카 님의 글을 읽다 좋은 글을 발견했지 뭐겠어요?

<노동은 인간의 보배이다. 노동은 기쁨의 아버지다. 노동은 행복의 법칙이다.

노동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노동은 신체를 굳세게 하고, 가난은 정신을 굳세게 한다.

자기 자신에게 육체적 노동의 고귀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약탈 강도의 준비를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노동은 우리로 하여금 권태, 악덕, 욕심에서 멀어지게 한다.>”

“좋은 잠언이지. 나 역시 그 말대로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고.”

“그래서 말씀인데, 저도 이제 일을 시작하고 싶어 졌습니다.

후작님 덕분에 그동안 많은 걸 보고 배우고 하긴 했지만, 노동의 기쁨도 누리고 싶어 졌답니다. 이 글을 읽은 후 더욱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글쎄요. 딱히 뭐가 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 됐건 상관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내가 뭘 하나 부탁해도 될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네만.”

“물론입니다. 뭐든 시켜주심 성심을 다 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성심만으론 부족한 일이기도 한데.”

”그럼 뭐가 더 필요한지요? 말씀을 해주세요.”


잠시 숨을 고른 후작이 말을 이었다.


“뭐랄까? 신의랄까? 복종이랄까?”

“신의든 복종이든 뭐가 됐든 전 준비가 됐습니다. 후작님께서 명만 내려주시면요.”

“그렇다면 내가 부탁을 할 테니 오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재에서 만나기로 하지.”


그래서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시몬느는 서재로 가 후작을 기다렸다.

그즈음엔 후작은 여러 바쁜 일 때문인지 그녀와 따로 식사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그녀는 홀로 식사를 마친 후 그를 만나기 위해 서재를 찾았다.

서재로 들어온 후작의 얼굴은 낮에 정원에서 봤던 평화로운 얼굴 대신 뭔가 결의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를 테이블로 인도했고, 그들은 그렇게 마주 앉았다.

물론 그전에 후작은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내 주었고, 그녀는 공손히 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몬느. 내가 부탁할 일이 어렵진 않지만 놀라울 순 있을 거야.”

“네. 뭐든 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후작님!”


그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절대 비밀이어야 하고, 자네가 돌아온 후 삶은 이전과 달라지는 게 없을 거야.”


그녀는 일종의 설렘을 간직한 채 그를 바라봤다.


“우선, 놀랄 준비는 돼 있겠지? 내 이미 언급했으니?”

“네. 말씀하세요. 자꾸 그렇게 뜸을 들이시니 더 궁금해지며 이젠 자못 두려워지기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게.

우선 자네는 내가 주는 걸 이용해 전혀 다른 장소로 가게 될 거야.

이전에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그곳에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조금 전부터 후작은 그녀를 ‘너’란 호칭에서 ‘자네’란 호칭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순 있지만, 시몬느는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녀의 눈가가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후작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그곳에서 레프 다비드피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고,

그의 사상을 잘 듣고 와 내게 전해주기만 하면 돼.”


시몬느는 순간 후작의 눈빛에서 광채를 발견했다.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시몬느가 물었다.


“그런데, 제가 전혀 다른 장소에, 본 적이 없는 세상에 있게 될 거란 말씀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이야길 좀 더 하자면, 우린 자네를 미래로 보낼 거야.

그러니까 자넨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훨씬 뒤에 있게 될 세상에 가게 될 거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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