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첫 번째 시간여행>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후작이 다시 입을 뗐다.
“알아. 지금 이게 무슨 소린지 무척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
하지만 사실이야. 자네도 이미 느꼈겠지만, 모임을 갖는 우리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어.
그러니까 이건 신의에 관한 문제라고 내가 이미 말했던 거고.
일단 내 말을 믿고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난 후 그 사람의 생각을 내게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자넨 이미 자네의 능력을 어느 정도 내게 보여줬어.
자넨 전생을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지.
자네 역시 나머지 우리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예정된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과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자신이 미래로 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불가능한 일을 자신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후작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녀를 차분히 기다려줬다.
다소 마음이 안정되길 기다리던 그녀가 후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미래로 간다는 이야기는 제가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게 가능”
“그러니까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하는 거지. 일전에도 내가 말했지.
보이는 게 절대 다가 아니라고. 그런 차원이라고만 일단 생각해.
다녀오고 나면 더 많은 걸 배우고 경험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미 일상적이지 않은 광경을 자네도 봤잖아.
자네 역시 일상적이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고 말이야.”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가고 어떻게 돌아오는 거죠? 그리고 의상이나 그런 거는요?”
“내가 주는 이걸 가지고 있다가”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동그란 원 안에 숫자가 적혀있고 작은 바늘이 세 개가 있는 물건을 보여줬다.
시몬느에게 그 물건은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고,
당시 그녀는 그것에 특별한 기능이 탑재돼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 개의 바늘이 한자리에 다 모였을 때 옆에 있는 이걸 누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걸 누르는 순간 자네 눈앞에 문이 하나 보일 거야.
그 문은 10초 동안만 있다 사라지니 바로 열고 들어가야 해. 그 문 안으로.
새로운 세상을 갈 때도, 또 이 세상으로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자네는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고, 당연히 의상도 거기에 맞게 변하게 돼.”
“그럼 제 외모는요?”
“그것 역시 자네가 맡은 일을 할 사람으로 바뀌게 되지.”
내 외모가 바뀐다? 이건 또 뭔 소리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주 많이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궁금한 것들을 계속 물어봤다.
“그런데 언제 이 세 개의 바늘이 다 모이는 거죠?”
“그건 하루에 두 번인데, 자네가 떠나야 할 땐 아주 늦은 밤일 때야.
숫자 12에 이 세 개의 바늘이 다 모일 때 이걸 눌러.”
하면서 옆에 있는 조그맣게 돌출된 것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 입으로 뭐든 시켜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나는 그동안 후작 덕에 좋은 곳에 와 좋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았던가?
그때 갑자기 시몬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후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못 돌아오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되죠?
혹 제가 이걸 누르는 걸 깜박하게 된다든지.
참! 제가 그곳에 가면 제가 지금 사용하는 말을 쓰는 건가요? 그리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럴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부탁하지도 않아.
그리고 언어는 지금 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되고.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푹 잠이나 자두지. 내일 많이 바쁠 테니까.”
아직 해야 할 질문이 더 남아 있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당시 그녀는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있겠지? 자네가 맡은 일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야.
물론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여겨 부탁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침착하게, 현명하게 대처하면 돼.
참, 자네는 그곳에서 시몬느 베이커란 이름의 처자야.
자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지?”
이쯤에서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그렇게 해서 그녀는 시간 여행자가 되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시간 여행자. 멋지지 않은가?
이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겪게 될 미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어마어마한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서 시몬느는 그날 밤 바늘 세 개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후작이 말한 시계의 버튼을 눌렀고, 그녀 눈앞에 열린 문을 10초가 되기 전 통과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녀는 어떤 외딴 골목에 서 있게 됐다.
원래 그녀가 있던 곳은 밤이었지만, 그녀가 도착한 그곳은 낮이었다.
물론 그곳이 어딘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가 살던 세상과 완전 다른 세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의상도, 자신의 의상도 이전에 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가 살고 있던 세상에 비해 심리적으로 암흑에 가까운, 뭐랄까?
사람들의 표정이 많이 초췌해 보였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듯한, 뭔가 많이 불안정하고 힘든 모습이 역력했다.
보지 못하던 바퀴 달린 것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기도 했고, 건물 양식도 많이 달라 보였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그때 중후한 한 남성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레프 다비드피치라고 소개하면서 그녀에게 시몬느 베이커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금테안경을 쓰고 있었고, 콧수염을 달고 있었으며, 뭔가 초조해 보였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워낙 시급하고 불안해서인지 초조한 행동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곳 역시 이 전에 본 적 없는 그런 장소였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들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신기하게도 시몬느는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뭘 마시겠냐고 묻는 거였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전생 덕이 확실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분명 그녀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썼던 언어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고.
머뭇거리는 그녈 보더니 레프가 뭔가를 주문했다. 자신과 그녀를 위해.
그리고 잠시 후 그들 앞에 차가 나왔고, 그녀는 그걸 마셨는데 그건 차가 아니라 예전에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매우 쓴 음료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있는데, 그녀가 앉은 곳에서 창을 통해 정면으로 보이는 한 가게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인 듯 보이는 사람을 몇 사람이 폭행하는 장면, 그리고 그 가게 앞 유리창에는 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안 된다는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살펴볼 필요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레프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은 간단하게 이런 거라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해지기 위해 최후 승리하는 그날까지 혁명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층은 이 혁명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들은 내부의 모순성으로 인해 서로 합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의 행동부터 언어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에 촉각을 세우고 그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었고, 듣다가 중요한 대목은 펜으로 노트에 쓰기도 하면서 임무에 충실했다.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간혹 분심이 들기도 했는데 왜 아니겠는가?
그나마 담대하기에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내지 심장이 콩알만 한 사람이라면 벌써 그 콩알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지나가던 새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처음 보는 생경한 것들에, 처음 보는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까지, 상황이 이러할진대.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가면서 그와의 일은 예상외로 잘 이뤄졌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녀는 그가 말하는 걸 주로 받아 적는 입장이었고,
가끔 그가 신중하고 사려 깊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그녀가 사력을 다해야 했다는 것만 빼놓고 보면 그런대로 괜찮게 진행됐다.
간혹 어딘지 모르게 쫓기는 자의 경계심이 그의 주변을 휘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긴 했지만, 그는 그녀가 하는 말에 의심을 품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시몬느가 현생에선 경험도 없고 나약한 시종에 불과했지만, 이전까지 여러 생을 살았고 그 기억의 편린과 함께 했던 경험들이 무의식적으로나마 그녀에게 준 혜택 덕이라고 해두자.
시간이 꽤 흐른 후 한참 얘기 중이던 그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는지 엉뚱한 질문을 그녀에게 던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