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할리페' 6

6화 <관계의 법칙>

by 꿈꾸는 노마드

다음날 야외정원에서 시몬느는 후작을 다시 만났다.

그는 그녀를 보자 달려오듯 다가왔다.


“어제 말했던 건 잘 해결됐나?”

“네? 뭘 말씀하시는 건지...”

“관계 맺음에 관한 거라고 해두지.”

“아, 그거요? 어젠 워낙 피곤해 생각을 멈췄고, 오늘은 그것보다 다른 생각을 좀 하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생각이라니?”

“제가 만났던 레프 다비드피치란 사람에 관해서요.

그가 말했던 것들을 한 번 정리해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리가 다 됐나?”

“물론 아닙니다. 제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다만...”

“다만?”

“다만 그가 말하는 사회는 제가 꿈꾸는 사회와 매우 비슷한 듯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지?”

“만인이 공평한 사회요. 그리고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사회요.”

“다음번엔 자네도 우리 모임에서 발언권을 가져야겠는걸.”


그의 이 말이 자신에 대한 칭찬이라 여겨져 시몬느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자네가 건네준 노트를 보면서 생각들을 정리하는 중이지.”

“......”

“그가 말하는 사회가 현실 가능한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하다 그는 말을 멈췄다.


“아니, 이런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제 우리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우리 이야기란 말에 시몬느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네가 지난번 그랬지? 노동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네,”

“그래서 말인데, 노동이라고 해서 몸을 꼭 써야 하는 법은 없지.

무슨 말이냐 하면, 머리로도 노동이 가능하단 얘기네.

그런 면에서 자네가 미래로의 여행을 단행했던 것도 알고 보면 하나의 노동이라 볼 수 있고.”


사실 그녀가 말하는 노동의 의미는 그게 아니었지만, 시몬느는 후작이 말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가만히 듣기로 했다.


“내가 문제를 줄 테니 거기에 맞는 답을 좀 찾아줬으면 해.”

“뭔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까 일테면 한 남자가 여자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문제가 있거든.”


그는 잠시 쉬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문제라는 게... 그는 두려운 거야.

그 여자에게 자신의 관심을 표현했을 때 그녀가 보일 반응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후의 일이.

그러니까, 자신을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다 문제로 여긴다는 거지.”

“잠시만요. 정리를 하자면 한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한 남자가 여자의 반응이 두려운 게 아니라 다른 게 두려운 거라고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문제란 거지. 그는 사실 많이 복잡한 사람이거든.”

“아, 네... 그런데 전 벌써 답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래?”

“그 남자분이 그 여자분 외 다른 걸 그토록 신경 쓴다는 말은 그만큼 그 여자분이 절실하지 않다는 얘기일 거예요.”

“아, 절실하지 않은 거다?”

“그렇죠. 복잡하다는 의미가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절실한 무언가를 위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요.”

“으음...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하군. 암튼 고맙네.

그런데 자넨 노동의 기쁨이 느껴졌나? 내게 답을 주면서?”

“네? 아~ 뭐~ 대충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합니다, 후작님.”


그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식사를 마친 시몬느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집사 알랭이 서재로 들어와 그녀에게 소식을 전했다.


“지금 후작님께선 외출 중이신데 아무래도 오늘 안에 못 들어오실 거 같단 전갈을 방금 받았습니다.”


그런 소식을 전하는 게 다소 의아스러웠던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혹시 여쭈어봐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왜 그런 말씀을 전해주시는 거죠?”

“후작님 성에 머무시는 분이시니 전해 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후작님께서 안 계시니 이제 곧 서재를 떠나 주십사 부탁 올리는 거고요.”

“아, 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읽던 것만 마치고 나가도록 하죠.”


하곤 그녀는 읽던 책을 다시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읽던 책을 접어 원래의 자리에 꽂아 놓은 후 서재를 나왔다.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곧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집사의 언행도 뭔가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고, 후작이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비운 것도 이상했다.

그녀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침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순간, 후작의 방으로 한 번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을 나와 살금살금 후작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위가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후작의 방에 도착한 그녀는 먼저 노크를 해 보았다.

하지만 집사의 말대로 후작은 외출 중이었는지 방에선 아무 응답이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방 쪽으로 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급히 숨을 곳을 찾던 그녀는 옆 방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문을 조금 열어 누군지 확인했다.

놀랍게도 집사 알랭이 후작을 부축해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상처를 입은 듯 후작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후작과 집사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그녀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느라 한동안 그곳에 머물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그녀는 곧장 침대로 가 몸을 뉘었다.

잠시 후 몸을 일으켜 세운 시몬느가 읊조렸다.


“안 되겠어!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서 곧장 후작의 거처로 향했다.

후작의 방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었다.

후작의 침대가 보였고, 후작이 침대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다가가 그의 곁으로 갔다.

침대 머리맡 램프가 켜져 있었고, 그 덕에 그녀는 후작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후작은 다행히 크게 다친 거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 시몬느의 눈에 그의 복부에 붕대가 매여있고, 피로 젖은 게 보였다.

그리고 피곤함에 지친 후작의 얼굴로 다시 눈길을 돌렸을 때 왠지 모르게 미래에서 만났던 그 남자의 얼굴이 그에게서 보이는 듯 느껴졌다.

젊고 패기 넘치던 남자. 현란한 말솜씨로 그녀를 이성에 무릎 꿇고 굴복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

순간 시몬느는 의아했다.


‘그는 후작보다 젊은 남자였는데, 후작의 얼굴에서 왜 그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와 후작은 사상도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왜 그를 봤을 때 익숙한 느낌을 받았던 걸까?’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후에도 이상하게 그 생각이 그녀를 압도했다.

그러다 후작이 상처를 입었던 게 떠올랐다.


‘그는 왜 어디서 그런 상처를 입은 걸까? 많이 다친 걸까?

상처를 보고도 왜 난 후작과 그 남자의 유사성에 대해서만 골몰했던 걸까?

진정 내가 관심을 갖는 건 후작일까, 아니면 그 남자일까?’


동시에 이런 의문이 그녀를 엄습했다.


‘후작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정확히 뭘까?’


답을 내릴 수 없었던 그녀는 사람과 사람 간 관계의 법칙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산책을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사냥을 따라가는 것도 시들시들해졌다.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다른 생각에 빠져들면서 모든 게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녀는 후작을 보면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판단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전처럼 후작에게 행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녀의 마음을 종종 읽던 후작은 이런 그녀를 보고 오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미래에서 만난 사람을 잊지 못해 고민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싶더니 급기야는 그녀가 자신의 성을 떠나고 싶은 것으로 오해했다.

많이 오버긴 했지만 왜 아니겠는가?

자신을 피하는 걸 그도 느꼈을 테니.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시몬느에게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요즘 자네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워낙 요원해 내 심장을 짓누르다 못해 실제 내 심장이 어디 붙었는지 알지 못하겠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네.”


딱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가만히 그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이제 그만 내 성을 떠나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난 자넬 떠나보내야겠지.”

“......”

“내 말이 맞나 보군.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니.”


그게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그녀는 또 그대로 가만히 그의 말에만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겠지. 무릇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 중 변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지.

달도 차면 기울 듯 모든 건 변하게 마련이지.”


자신을 변호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녀가 약간의 용기를 내어 이렇게 반박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답니다.”

“그 얘긴 자네가 그렇단 뜻을 내포하고 있는 건가?”


그는 확인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는 대신 이런 말로 후작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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