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성과 감성 사이>
“만약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에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은가요?”
의외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시몬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고소하고도 달콤한 것을 먹으며 사람들이 활동하는 뭔가를 보고 싶습니다. 그 장면들이 낭만적이고, 희망적이었으면 좋겠고요.”
“하하~ 사람들이 활동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고요? 영화를 말하는 건가요?”
그의 말에 마땅히 대꾸해야 할 답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에게 던지는 맥락 없는 엉뚱한 질문으로 상황을 타개해 나갔다.
“그래서 아까 하신 말씀은 부르주아들은 서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이신 거 맞죠? ”
얼마간의 시간이 다시 흘렀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마쳤다.
대화를 마친 그들은 밖으로 나왔고,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가 멀어져 가자, 갑자기 그녀는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거 같단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와 헤어진 후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녀는 한동안 거리를 헤맸다.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려면 어차피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그녀 앞에 펼쳐진 풍경은 전혀 낯선 것뿐이었고, 심신이 피곤해진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던 특유의 호기심에 굴복할 힘조차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근처를 한 바퀴 돈 다음 아까 그 장소로 다시 갔다.
그곳에 들어섰을 때 웬 젊고 패기 넘치는 한 사내가 그녀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 그의 옆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에게 말을 붙였다.
“담배 한 개비만 빌릴 수 있을까요?”
너무나 놀랍게도 그녀는 그때 그들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그가 그녀에게 담배를 건넸다.
“불이 없어 마치 크림 빠진 에클레어 같은 꼴이니 이를 어쩌죠?”
그가 직접 그녀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프랑스에서 오신 분 같군요. 그런가요?”
“아, 네, 뭐...”
머뭇거리는 그녀를 배려하는 듯 그는 조용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녀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쪽도 딱히 바빠 보이시진 않으시니”
“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렇게 해서 그들은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대중에 대해,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자기가 주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물론 주로 듣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 가끔 그가 우쭐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선 칭찬과 공감을 드러냈다.
그는 대단한 달변가였고,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더불어 앞으로 뭔가 큰일을 할 사람으로 느껴졌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그가 그녀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이곳에 연고지를 갖고 있지 않거나 혹은 유대 조상의 피를 갖고 있다면 하루빨리 이곳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알겠다고 심플하게 답을 한 다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어떤 사상을 선전하는 건 일종의 예술 행위죠. 그런 의미에서 선전하는 사람들은 민중을 다룰 줄 아는 심리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고요.”
“하지만 선전을 한다고 해서 모든 민중이 그 선전을 믿는 건 아니겠죠?”
“모르는 말씀입니다. 거짓말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답니다.
사람들은 한번 말한 거짓말은 부정하지만, 두 번 말하면 의심하다가도 세 번 말하면 곧 그걸 믿게 되죠.”
“과연 그럴까요?”
시몬느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엔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점차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언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런 기분이 전혀 싫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그에게선 낯설지 않은 느낌이 풍기고 있었다.
한참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그는 그녀에게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딱히 할 일도 없던 그녀는 못 이긴 척 그를 따라가 약간의 포도주를 곁들여 그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가 묵고 있는 곳으로 갔다.
보통 때의 그녀 같으면, 그러니까 원래 있던 세상의 정숙하고 똑 부러진 그녀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그때는 한 번뿐인 시간 여행자로서의 새로운 경험과 기회에 될 대로 되라는 심리가 그녀에게 도사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매력적이고 패기 넘치는 한 남성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그다지 나쁜 행위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이건 먼 미래에서 벌어진 한 번의 해프닝일 뿐이라고, 그냥 꿈같은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호기심이 많고 어느 정도 대담한 그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추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녀는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고, 거기서 그녀는 그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잠에 빠진 그를 뒤에 남기고 욕실로 가 동그란 물건을 들여다봤을 때 그녀는 곧 때가 됐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침실로 가 살며시 옷과 노트를 챙겨 다시 욕실로 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던 그녀는 드디어 세 개의 바늘이 한 곳에 모였을 때, 튀어나온 부분을 힘껏 눌렀고,
눈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해 자신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아주 쉽게, 첫 번째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꿈에서 깨어나듯 자신이 살던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 자신이 지내던 침실을 확인한 다음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게 됐다.
다만 그곳으로 갔을 때 시간이 바뀐 것처럼 밤에 그곳을 떠났지만,
도착해 보니 살던 곳은 아침이었다.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예전 그대로였고, 모든 게 다 그대로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계집종이 들어와 그녀에게 후작의 전갈을 전했다.
“시몬느님! 후작님께서 아래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일단 사유를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계집종에게 알았다고 말하곤 급히 세수를 마친 다음 곧 서재로 향했다.
그전에 옷 속에 감추고 있던 노트 한 권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재에서 그녈 기다리고 있던 다르망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기특하다는 듯 그녀에게 다가와 그녈 살짝 안아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빼 그녀가 편히 앉을 수 있게 배려해 준 다음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그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두려웠나? 많이?”
“아니요. 처음엔 사실 많이 두려웠지만, 시간이 가면서 괜찮아졌습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군.”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지만 있다 보니 적응이 됐습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면서 그녀는 그에게 노트를 건넸다. 노트를 건네받으며 그가 대꾸했다.
“그렇게 받아들였다니 정말 고맙군. 자네 이번 임무가 차후 우리들 일과 지대한 연관이 있지. 좀 더 자세한 이야긴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 큰일을 했으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게.”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제가 갔던 세상에서 제가 했던 행위가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까요?”
“글쎄...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봐야 답을 해 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예를 들어 제가 제 의지로든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든 타인과 관계를 맺고 돌아왔다면 그게 이 세상에서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요.”
“그 얘긴 그곳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왔단 이야기로 들리네만, 그렇게 해석해도 될까?”
“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조금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세상이란 사실을 제 편의에 맞게 해석한 게 아닌가란 후회가 조금 들기도 하거든요.”
“하하~ 뭐가 됐든 상관없어. 그건 그냥 거기서의 일일 뿐이야.
마음에 담아둘 가치가 있다면 다소의 그리움으로 치환하면 될 것이고, 가치가 없다면 잊으면 돼.”
그 말을 듣고 보니 시몬느 심사는 더 알쏭달쏭해졌다.
하지만 후작과 대화를 나누며 더욱 분명해진 것은 분명 거기서의 일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그리움이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와 자신 사이에 쌓인 거라곤 대화를 나누며 느낀 호감과 이성보단 당시의 상황이 그녀에게 몰아준 현란한 감정이 고작 다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문제에 관해선 나중에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지금은 후작 말대로 쉬기로 했다.
그래서 그 일에 관한 생각을 멈추기로 작정하고 후작에게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침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