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할리페' 7

7화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by 꿈꾸는 노마드

힘겹고, 통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후작이 말을 이었다.


“나의 지혜가 땅에 닿았나 보군. 이제 자네에 대해 더는 알 수가 없으니.”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야 했다.


“지금까지 듣던 말 중 가장 슬픈 말입니다.”

“나 역시 오늘을 내 생애 가장 슬픈 날 중 하나로 기억함세.”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내 속마음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가?

서로에게 가장 슬픈 말이 되고, 슬픈 날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시몬느는 끝까지 입 밖으로 그녀의 생각을 내놓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아. 자네가 원하는 곳 어디로라도.”

‘결국 그는 나를 포기하려 하고 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대로 물러났다.

그녀는 무력하게 침실로 돌아왔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실 꾸릴 짐도 얼마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면서 생각을 정리한 후 그에게 자기 속마음을 속 시원하게 밝히고 싶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끄는 동안 그가 돌아와 자기를 잡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아래로 내려왔고,

그가 준비해 놓은 마차에 올라 그의 환송도 받지 못한 채 그의 성을 떠나야만 했다.

환희와 설렘에 젖어 처음 성안에 들어섰던 얼마 전의 일이 마치 꿈인 듯 절망과 비탄에 빠져 성을 떠나면서 그녀는 이거야말로 현실이 아닌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너무도 쓰라리고 아픈 현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아주 오랜만에 그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가족은 그간의 행적에 대해 궁금해했고,

무엇보다 왕궁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후 그녀가 겪은 일들을 소상히 다 알고 싶어 했다.

특히 그녀의 여동생 엠마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그들에게 들려주느라 한동안 자신의 슬픔 따윈 잊어버린 채 밤낮으로 입이 붙어있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그렇듯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예전의 아픔도 시들해져 그녀는 그제야 마음의 여유를 갖고 그간 그녀에게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왕궁에서 보고 들었던 일, 후작을 만나 졸지에 후작의 성을 방문했던 일, 후작의 은혜로 꿈같은 시간을 보냈던 일, 후작의 부탁으로 시간여행을 했던 일,

그리고 미래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고 그에게 호감과 매력, 그리고 묘한 친근감을 느꼈고

그와 좋은 시간을 보냈던 일.


‘그런데 가만! 왜 후작을 보면서 그를 떠올리게 됐던 걸까?’


다시금 그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또 궁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후작을 흠모를 넘어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후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다 미래로 간 나는 그를 보고 젊은 시절의 후작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거고,

그 결과 거리낌 없이 그와 그렇게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설마? 후작은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나는 그의 사상과 박식함을 흠모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건 또 웬 말도 안 되는 상상력 가동이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엠마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어! 어... 아니야.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중이었어.”

“언니가 들려준 이야길 내가 생각해 봤는데, 그 후작님 말이야.

왜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온 거래? 이유는 물어봤어?”


엠마의 말에 시몬느는 순간 도끼로 정수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못 물어봤네.”

“그걸 물어봤어야지. 언니 말을 듣다 보니 언니는 그 후작님을 아주 많이 사모한 거 같은데.”


엠마의 말에 깜짝 놀라며 그녀가 외쳤다.


“뭐? 내가 후작님을 사모했다고? 아니 사모는 아니고... 흠모했지.

그분은 아주 뛰어난 분이셨거든.”


이상하다는 듯 엠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박했다.


“흠모든 사모든 뭐가 됐든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 다쳤는데 왜 그걸 물어보지 않은 거냐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시몬느는 생각에 잠기며 대답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겠지. 다른 일로.”


엠마가 놀라며 소리쳤다.


“다른 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 내가 사모, 아니 흠모한 분이 다치셨는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내가 왜 그랬을까?”

“내 생각엔 언닌 후작님 성으로 돌아가 그걸 꼭 물어봐야 해.”


엠마의 말에 그녀는 많이 놀라며 물었다.


“뭐? 내가 왜 다시 거기로 돌아가서 그걸 물어봐야 하는 거지?”

“에이 바보야! 그래야 언니가 그분과 계속 이어질 수 있잖아.”

“뭐라고? 그분과 계속 이어지...?”


엠마가 마치 동생에게 조언하듯 다소 거만하게 그녀에게 외쳤다.


“뭐가 두려워서 그래? 중요한 사람을 놓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지.

이 언니가 정말 감이 많이 떨어졌네, 떨어졌어!”


그때 시몬느는 또 깨달았다.

자신이 후작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고대로 동생에게서 듣고 보니 모든 게 더 확실해졌다.

인간이란 어쩌면 철저하게 부조리 자체일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이 순간 그녀를 엄습했다.

그녀는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 말을 빌려 후작의 성으로 내처 달렸다.


후작은 그녀의 방문을 적잖이 놀라워했다.

동시에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후작에게 물었다.


“후작님, 제가 뭘 잊고 간 게 있어 이렇게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후작님께서 외출하셨다가 돌아오신 그날, 후작님께서는 왜 상처를 입고 돌아오셨나요?”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대답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왜 중요한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건... 앞으로의 제 삶과 연관이 있을 거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가 자네의 삶과 연관이 있다?”

“네. 분명 연관이 있을 겁니다. 아니, 있습니다!”


다소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후작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그 이야길 꼭 해야 할 이유는 없을 걸세.”


절박해진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매달렸다.


“아니요. 꼭 해 주셔야 합니다. 꼭요!”


그제야 후작이 마음을 가라앉힌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하하~ 그렇게 꼭 듣고 싶다면 오늘 저녁 우리 모임에 참석해 보지 그래.”


그녀가 확고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요.”

“물론이지. 자넨 막 그 모임에서 발언권을 가지려던 차에 제 발로 나가게 됐지만, 참석권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말이지.”

“네. 꼭 참석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그날 저녁까지 후작의 성에 다시 머물게 됐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그의 서재로 향했다.

그의 서재에는 그녀가 전에 봤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곧 서재 문이 닫혔고,

그녀를 제외하고 21개의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그들만의 의식을 행한 후 일사불란하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작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난번 논의했던 그 일에 관해 오늘은 좀 더 상세하게 토의를 진행하려 합니다.

그전에 제가 다녀온 일에 대해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역사의 대현장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꿈꿨던 세계가 이뤄지는 순간을 함께 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혁명군의 선봉에 서서 제가 맡은 과업을 완수했습니다.

국왕은 마침내 굴복했고, 귀족과 부르주아들도 모두 공포에 질려 항복했습니다.

우리가 켜켜이 쌓아 올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염원이 드디어 200년을 훌쩍 넘어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역사는 계속 그 길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단코 그 하루가 끝이 아닐 테니까요.

또한, 우리 역시 이곳에서 우리의 역할과 소임을 다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감옥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전 상처를 입고 돌아왔지만,

다행히 지금은 다 완쾌되었습니다.”


참가한 모든 이들이 감격 어린 시선으로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가 다친 이유를 알게 됐다.

정확히 무슨 일인진 알 수 없어도 그는 미래로 갔던 거고,

뭔가 큰일을 하고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그의 숭고함이 더욱 빛나 보였다.

그 자신 귀족임에도 모든 특권을 부정하고 보다 많은 이들이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시대를 뛰어넘어 몸소 실천해 보인 사람.

그가 말했던 복잡한 사람의 실체가 누군지 그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철저히 이성의 통제를 받는 사람.

자신의 일신보다는 더욱 많은 이들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

이상의 추종자.

그의 이런 고뇌와 이상과 윤리의식을 자신은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뇌 없이 당돌하게 내렸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회의가 미처 끝나기도 전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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