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기억의 소환>
견디지 못한 나는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배경이 되는 그곳으로 도망을 쳤다.
그곳에 가면 혹시라도 뭔가 내 뇌 속의 해마를 자극해 소설이 계속 써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그렇게 해서 나는 당일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고,
당일 인천공항에 도착해,
당일 그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푼 난 한동안 멍청하게 호텔방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다가 슬슬 시장기가 느껴져 저녁을 먹기 위해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사실 레스토랑이라기보다 카페라고 불리는 게 더 어울릴 그곳에서 나는 간단하게 연어구이에 퀴노아와 양배추 샐러드를 곁들여 식사를 마치고 따끈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의 여정에 대해 또 나만의 소설을 몇 편 써보기도 하면서,
혼자 희희낙락 미소까지 지어가면서 놀았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해져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사위는 어두웠지만, 소설을 풀기 위해 전생의 기억에 골몰했던 나는 샹젤리제의 화려한 레온사인을 거쳐,
개선문을 거쳐, 에펠탑까지 어둠을 뚫으며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샹젤리제와 개선문 근처를 제외하면 밤의 파리는 명확히 낮의 파리와 큰 차별성을 보여줬다.
들뜬 몇몇 관광객들을 빼면 사람 구경을 할 수도 없었고,
어둠 속에 잠긴 타지는 외지인에게 깊은 외로움을 선사하는 곳이 확실했다.
센치멘탈 하면서 동시에 노스탤직한 감정을 겨우겨우 눌러가며 난 계속 걸었고,
그러다가 결국 센강까지 오게 됐다.
그곳에 도착해 강을 내려다보면서 처음에는 남편과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선택해 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포숑에서 사 온 마카롱을 내 입에 넣어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사람.
우린 그때 파리를 거쳐 반고흐가 살았던 아를,
내가 좋아하는 화가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 그림 같은 안씨와 샤모니를 거쳐 지중해변의 여러 곳을 여행했었지.
일명 ‘꼬다쥐르’라고 불리는 그곳을.'
영화제로 유명한 칸느와 하얀 요트들이 줄지어 정박 돼 있던 마르세이유,
그리고 해가 너무 좋아 그냥 그대로 바다에 빠지고픈 충동을 겨우 참아낸 니스까지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한 번은 렌터카로 높은 지대를 운전해 가다 내가 호흡곤란을 겪자 그는 죽을 거같이 아픈 나보다 더 죽을 듯이 날 염려했었는데.'
결국 계속 가길 포기하고 우린 차 밖으로 나와 소박한 들꽃과 들판을 풍경 삼아 계획에도 없던 작은 피크닉을 현실화했었고,
갓 구워 나왔던 사 온 바케트와 치즈에 어느 정도 돈을 투자한 프랑스 와인을 곁들이며 마냥 행복해했었던 게 바로 엊그제 같기만 했다.
하지만 곧 그건 이미 쓸데없는 추억놀음이라는 걸 자각하곤 난 애써 그 기억을 지우려 노력했다.
고개를 도리질까지 쳐가면서.
그리고 잠시 마음을 진정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다리 쪽에 있는 청동상을 보게 됐다.
그걸 보자 전생의 내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유학을 했던 당시, 잠시 이 도시에 들렀을 때 여길 다녀갔다는 게 기억났다.
'그게 언제였지? 그때 난 여기서 뭘 봤더라?
아, 그때 내 나라 러시아와 파리의 공조를 기념해 이곳에 지어진 이 다리를 봤었지.'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보면서 뿌듯했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뒤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또 다른 그 생의 기억들.
유학을 마치고 러시아혁명에 가담한 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벌였지만 결국은 실패한 일.
가정이 소멸해야 완벽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극단적 논리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까지 경원시됐던 일.
실패한 결혼. 그리고 그 후 만났던 남자들과 나눴던 사랑.
남자들의 편견 못지않게 부르주아 여성들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문제가 여성해방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던 일.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위해 권리와 정의를 부르짖었던 일.
함께 혁명을 논했던 레닌과 스탈린과 갈등을 빚었었던 것까지 실로 많은 게 떠올랐다.
그러다가 이런 기억에 이르렀다.
'아, 바로 그때 나는 레프 다비드피치를 재회했었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가 낯익게 느껴졌었는지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알렉산드라로 살면서 전생을 기억했었는지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시몬느로 살았던 삶 이후 몇백 년이 흘러 그를 다시 만났던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랬었던 거구나!
그 이전 시몬느로 살았을 때 미래로 시간여행을 가서 그를 만나고 헤어지던 날
언젠가 그를 다시 보게 될 거 같다고 생각했었던 게 결국은 그렇게 현실화 됐던 거였구나.'
그와 함께 나누었던 이상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와 동지애를 갖고 함께 도모했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역사가 돌고 돌 듯 사람의 인생사도 돌고 돌아 만날 사람은 결국 또 만나게 돼 있는 거구나.
우린 둘 다 혁명에 실패했고, 그는 스탈린이 보낸 킬러에 의해 암살을 당했고, 그에겐 많이 미안하지만 난 운 좋게도 살아남았었지.
그는 죽으면서도 숭고했다고 한 동지가 알려줬었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한참을 파리 시내를 걷고, 또 걷다가 마침내 피곤해진 나는 호텔로 돌아와 먼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전신을 휘감자 긴장이 풀어지면서 내 기억의 사슬 역시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머리를 말린 후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랩탑을 켜고 그 앞에 앉았다.
그러자 문득 아주 오래전 다르망 후작이 시몬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도 이미 느꼈겠지만, 모임을 갖는 우리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어.
....
자네 역시 나머지 우리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예정된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어렴풋이 뭔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시몬느의 기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 다시 기록, 아니 소설로 완성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 키보드에 손을 얹고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키보드 위에서 내 손가락들이 춤을 췄다.
그렇게 해서 시몬느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었다.
***
오랜만에 탑에서 내려온 후작이 시몬느를 찾았고, 그를 보기 위해 서재로 간 그녀에게 말했다.
“자네 오늘 우리 모임에 참석하게.
그리고 오늘은 관찰자가 아닌 말 그대로 참가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네. 이해합니다.”
“그래. 그럼 이따 보도록 하지.”
그렇게 해서 그녀는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관자가 아닌 참가자가 됐다.
저녁이 됐고,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맘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서재엔 이미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 앉은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 도착해 이제 막 의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마침내 후작이 모임의 시작을 알렸고 그들은 함께 의식을 거행했다.
그녀 역시 그들과 눈빛을 마주하며 집중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그때의 느낌을 그녀에게 표현하라고 주문한다면,
먼저 머릿속이 멍해 오더니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고 급기야는 정신줄을 놓게 되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있던 독소가 빠져나간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 거라 여겨졌다.
암튼 그녀는 홀가분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에 휩싸여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노트에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들. 그리고 우리가 목표로 정한 일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
내가 해야 할 일들. 끊임없는 아이디어가 그녀의 손목과 손가락에 힘을 실어줘 자신도 모르게 글이 써졌다.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이 모임에 참가하게 된 게 이번 생에 최고의 행운이란 생각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래서 그녀는 후작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후작 역시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또한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던 거였다.
시간이 조금 흘렀고,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가장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다.
그녀가 그들과 대활 하면서 느낀 점은 그들은 살아온 이력에 따라 각자 구사하는 언어의 방식이 다르긴 했지만, 그 안에 숨은 진짜, 즉 그들의 꿈과 이상은 다 한결같다는 그것이었다.
모두 공평하게 자유롭게 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자는 그것!
그리고 이제껏 자신이 들었던 그 어느 말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진솔했고 순수했다.
그들의 말에선 한 점의 의혹도 거짓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엔 그런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게 전혀 사실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 그녀는 후작에게 이렇게 물었다.
“후작님! 저들이 한 점의 사심 없이 모두가 이루고자 하는 큰 뜻을 좇는 사람이란 건 잘 알겠는데...
저들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건 좀...”
“너무도 평범해 보인다는 소리겠지, 그 얘긴?”
약간 부끄러운 듯 그녀가 대답했다.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하하!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건 우리가 모두 평등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구성된 건 아니란 말을 먼저 하고 싶군.
하지만 일전에도 말했듯이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결론적으로 그들에겐 각자 고유의 특성과 능력이 있단 말이지.
겉으로 보이기에 평범해 보이긴 해도 말이야.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거야.
우선 하나만 말하자면, 그들 모두에게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야.
오늘은 그 정도로만 해두지.”
그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
“저...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뭐지?”
“절 다시 찾으시고 절 여기로 데려오신 이유와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과 분명 연관이 있는 거겠죠?”
“그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어떤 일이라는 건 아직 밝힐 의향이 없네만.”
그렇게 대답을 마친 후작은 곧 다시 탑으로 향했다.
그가 그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모임 외엔 그 공간에서 생활하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그날 그녀는 기쁨과 어느 정도의 고독감이 공존하는 맘으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