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사랑할 자격>
늦은 밤 집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를 보고 엠마는 많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또 돌아온 거야 언니? 그것도 이렇게 늦은 밤에.”
“그분을 알면 알수록 나는 그분을 흠모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짙어져.
그래서 도망쳐 나왔어.”
“자격? 사람을 흠모하거나 사랑하는데 자격 같은 건 없어.
두려울 순 있겠지만 절실함은 결국 두려움을 이길 수밖에 없고. 언닌 정말 바보로구나?”
“정말 너 말대로 그런 걸까?”
“그럼. 그러니 내일 아침이 밝으면 바로 그분께 돌아가, 언니!
돌아가서 그분께 속 시원히 언니 마음을 밝혀, 제발!~”
동생이 타이르듯 시몬느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그때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얘길 나누던 엠마와 시몬느는 밖으로 나갔다.
서재에서 다르망 후작이 그녀들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시몬느와 엠마가 다가가자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몬느를 보며 입을 뗐다.
"얘야. 후작님께서 널 찾아 이 야밤에 먼 길을 오셨구나.
너를 꼭 성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때 후작이 나섰다.
“급한 마음에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너무 시간이 늦었으니 만약 허락하신다면 저는 저 아래 마을에 숙소를 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집에도 손님이 묵으실만한 방이 있습니다.
후작님의 거처에 비해 많이 누추하긴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야심한데 남의 집 문을 두드리시느니 이곳에서 묵으시지요.”
그때 엠마가 끼어들었다.
“제발 그러시지요, 후작님! 후작님께서 우리 집에 머물러주신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시몬느는 그런 엠마를 바라보기만 할 뿐, 말 한마디 보탤 수 없었다.
그저 후작의 눈치만 살피며 애를 태우고 있는데 그때 후작이 예의 그 훈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엠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 그러시다면 숙녀님의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요.
참, 그전에 댁의 큰따님과 잠시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며 이번엔 시몬느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렇게 해서 거실에는 후작과 시몬느만 남게 되었다.
그는 시몬느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며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곧이어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영문도 모르고 후작에게 안긴 채 시몬느는 깨달았다.
‘그는 이미 내 모든 걸 다 이해한 것이다.
내가 떠난 이유도, 그를 다시 찾은 이유도, 그리고 다시 또 떠난 이유도,
그는 자신의 질투심으로 나를 떠나보냈고,
거기에 반발할 수 없었던 나는 무력하게 떠나 왔고,
사랑이든 흠모든 그와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나는 다시 돌아가 그와 이어지길 원했지만,
그의 원대한 이상과 이성 앞에 또다시 무력감을 느끼고 도망쳐왔다는 것을.
과연 나는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때 그가 시몬느에게 속삭였다.
“언제 어떻게 말하는지 그걸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언제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이지. 그래서 나는 지금 침묵하려고 하네”
그날 밤, 후작은 그녀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자신이 가지고 온 마차에 태우고 그녀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후작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그때 엠마가 또 이렇게 끼어들었다.
“언젠가 후작님의 성을 방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다면 우리 가족은 가문 대대로 이를 자랑
거리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후작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응답했다.
“귀여운 숙녀님께서 어찌 내 마음을 그리 잘 읽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그 이야길 하려던 참이었는데요.
이 가문의 따님들은 하나같이 지혜롭기가 미네르바의 부엉이 같습니다.”
후작의 칭찬에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고,
엠마는 시몬느에게 윙크를 날리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후작은 다시 한번 그녀의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그녀의 가족을 성에 초대한다고 말했고,
그녀는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 마차에 올랐다.
이번 마차는 처음 후작의 성을 방문할 때의 마차에 비해 더 아늑하게 느껴졌고,
캐시미어 덮개도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향긋한 장미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어 심신을 안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시몬느는 다시 한번 후작을 따라 그의 성으로 향했다.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운명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면서.
그를 사랑하든 흠모하든 다시는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처음의 환희와 설렘을 다시 가득 안고 그렇게.
성에서의 활기찬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시몬느는 다시 열심히 책을 읽었고 산책을 하기는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후작과 함께 나섰던 사냥에는 발길을 끊었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야겠다고 결심한 게 그 이유였다.
생명에 대한 존중을 굳이 인간으로 국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그녀는 자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사냥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작 역시 사냥하기를 멈췄다.
대신 그는 탑에 올라가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가 그를 볼 수 있는 날이 적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작의 이상에 좀 더 접근하기 위해 그녀는 기회만 되면 뭐든 배우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
.....
.....
.....
.....
갑자기 써지지 않는다.
꽉 막힌 느낌.
왜 이러지?
시몬느에 대한 기억의 배터리가 엥꼬가 된 느낌.
더 이상 후작과의 낭만을 논할 수도, 그와의 이상을 논할 수도 없다.
나는 한 번 크게 숨을 내쉰 다음 집중하려 노력한다.
아! 그래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시몬느와 다르망후작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는 건가?
.....
.....
.....
할 수 없이 나는 밖으로 나가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를 폐에 집어넣고 보니 심리적으론 안정이 됐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쯤에서 현재의 내 이야길 조금 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현재의 나, 그러니까 내가 시몬느였기도 했지만, 훨씬 후에 지금의 나로 사는 현재의 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내 직업은 소설가다.
나이는 30대 중반.
나는 20대 후반에 결혼했는데 남편과는 지금 별거 중이다.
아니 지금은 별거가 아니라 거의 이혼 직전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려나?
암튼 결혼할 당시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굉장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는데 당시 우리는 둘 다 잘 나가는 소설가였고,
한국판 샤르트르와 보봐르라는 찬사까지 받으며 많은 이의 축복 속에 결혼했었다.
그러다 우리가 별거하게 된 이유는, 우린 서로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고 한동안 그 사랑에 목매달며 너무도 행복했지만,
사랑, 아니 사람이라는 게 늘 그렇듯 시간이 갈수록 상대에 대한 환상이 벗겨지면서 많은 게 서서히 메말라갔고,
그래서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내뱉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진짜 이유는
내가 소설로 승승장구를 이어갔던 반면
남편은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변변히 소설 한 권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쉽게 짜증을 냈고, 난 그걸 받아주기가 너무 힘들었고 그러다 밥 먹듯이 우린 싸움을 하기 시작해 서로를 물어뜯게 됐다는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아직 남아 있는 사랑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한 우리는 따로 살면서 이성이 제자릴 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혹시라도 둘 중 하나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거나 하게 되면 그때 다시 우리 문젤 논의하기로 하고 말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가 며칠 전 내게 카톡을 보내왔다.
자긴 아무래도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울 거 같다고.
나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한참 답을 하지 않더니 급기야 이렇게 짧은 답을 보내왔다.
<여자가 생겼어.>
그런데 이상한 건 난 그의 이런 답변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거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 누구보다 정신, 육체 다 열정적이고 또 열렬했던 사람이니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쏟아부을 대상이 없어졌다는 건 그에게 마치 사형선고와 같았을 테니까.
아무리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눈앞에 바로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현물,
아니 사람을 포기할 순 없었겠지.
난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를 떠나보내고 내 소설에만 집중하겠다 맘먹었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게 잘 안 되었던 걸까?
시몬느가 돌아와 후작과 뭔가를 이뤄야 하는데 내 상황이 그 상황과 완전 반대다 보니 그들에게 그런 호사를 누리게 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누군가 날 강하게 의심하신다면 그건 완전한 억측이라고 강력하게 반박할 수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문제는 더는 그들에 대한 기억, 특히나 시몬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거였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그 소식을 듣고 난 후부터 말이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아무리 머릴 짜내도 소설이 써지지 않았던 나는 급기야 도망을 치고 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