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할리페' 10

10화 <두 명의 시간 여행자>

by 꿈꾸는 노마드

그리고 며칠 후 후작이 시몬느를 다시 찾았다.

그녀 방에 계집종을 보내 서재에서 보자 전했다.

서재로 들어서자 후작이 그녀에게 입을 뗐다.


“오늘은 다과를 하면서 다시 우리 이야길 조금 해 보도록 하지.”

“...”


그는 의자를 빼주면서 그녈 앉도록 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친히 차를 따라줬고 에클레어를 그녀 접시에 덜어줬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이건 좀 많이 실험적인 일이야. 자네가 허락해준다면 난 자네를 한 번 더 미래로 떠나게 하고 싶네.

그 이유는 그 시댄 여성의 인권이란 게 지금 이 시대의 그것관 아주 많이 다를 터인데,

그걸 배워 와서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면 좋을 듯싶어서 말이야.”

“여성의 인권이라고 하심은...”

“미래의 세상이 되면 분명 여성의 위상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거야.

예를 들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도 훨씬 다양해질 것이고, 또 지금보다 권리도 늘어나겠지.”

“여성의 권리라고요?”

“당연히 여성에게도 권리라는 게 있지! 비록 선인 중 현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말을 하긴 했지만 말이야.

<여자의 최대 미덕은 복종과 침묵이며, 남자의 미덕은 명령이다.>라고.”


이 말을 듣던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결의에 찬 모습으로 그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그 전에 제가 여쭙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래. 뭔가?”


시몬느는 다시 한번 결심한 듯 숨을 고른 뒤 그에게 말했다.


“간혹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되돌아가기도 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렇진 않아.”


시몬느는 더 궁금해졌다. 해서 이번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우린 미래로만 가는 거죠?

그러니까... 왜 우린 과거로는 가지 않는 건가요?”

“거기엔 이유가 있지.

우린 과거로 가 우리의 현재, 그러니까 그들의 미래를 알려줄 수 없네.

다시 말해 그들 스스로 설계해야 하는 미랠 방해할 생각이 없다는 거지.

대신 우린 미래로 가 그들을 탐색하고, 그들로부터 배워올 순 있다네. 이해가 가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그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우리가 미래로 가 그들에게 배워온다는 건 우리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거 아닌가요?”


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우리 스스로가 배우려는 자유의지를 갖고 하는 행동과 누군가가 그냥 알려주는 것과는.

가령 우리가 과거로 가게 되면 아마도 우린 그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거야.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런 존재거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능력을 내 보이고 싶어하는.

그래서 우린 과거로 가 그들의 미래가 바뀔 수 있게 만드는 그 어떠한 인위적인 시도도 지양하겠다는 거야.

그 결과 과거로는 가지 않는 것이라네.

그건 또 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게 되는 행위가 될 터이고.”


이해가 간다는 듯 이번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말씀을 듣고 보니 둘은 확실히 다른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인 것도 맞고요.”

“그리고 우린 미래로 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울 걸 배워오는 거야.

그게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인 거고.

미래를 바꾸진 않아도 미래로부터 배워 와 현재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인 셈이지.

물론 필요하다면 미래에 힘을 실어줄 순 있네. 내가 지난번 그랬듯이 말이야.

물론 그걸 통해 현재의 목표를 강화한다는 전제하에.”


시몬느는 그가 말하는 의도를 이제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런 그와 함께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자신에게 큰 자부심을 느꼈다.

바로 그때 후작이 부드럽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럼 이제 내가 하려던 이야길 계속 해도 되겠지? 물론 자네의 뜻이 먼저네만...

자네가 이번에 해야 할 일은 그곳에서 어떤 이가 되어 얼마간 생활하는 건데,

아까도 말했듯이 이걸 실험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넨 그곳에서 내 연인이 되어야 한다네. 우린 연인으로 그곳에 함께 가는 거지.”


시몬느는 후작의 이 말에 깜짝 놀라 외쳤다.


“네? 후작님과 제가 연인으로요?”


후작 역시 시몬느의 이런 반응에 약간 놀란 듯 민망해하며 응수했다.


“왜? 많이 어색한가? 아니면 거부감이 드는 건가?”


시몬느는 당황함을 감추지 않고 진솔하게 답했다.


“그저 당황스러워서요. 감히 제가 후작님과 어떻게 연인으로”


안심이라는 듯 후작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네. 우린 실제 연인이 아니라 그저 연인인 척하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자네와 난 지금보다 훨씬 나이 차가 없는 아주 젊은 연인이 될 거라네.

함께 사는.”


그 말에 시몬느가 더욱 깜작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함께 산다고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혼란스러워하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후 후작에게 재차 물었다.

“연인이 되어서 뭘 해야 하는 거지요?”

“우린 사교 모임에서 어떤 커플을 만날 거야.

그들은 미래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야.

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배우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물론 그들의 사상 전부가 아니라 특별히 내가 아까 말한 여성 문제에 관해.”


시몬느는 다소 의심스럽다는 뉘앙스를 숨기지 않은 채 이렇게 응수했다.


“그들의 사상을 배운다는 게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닐 텐데요.

지난번처럼 완전 작정하고 만나 그의 사상을 듣고 오는 일이라면 모를까요.”

“그러니까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게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화통한 사람들이라 쉽게 자기들의 생각을 전해줄 거고.

특히 그 여자분은 여성 인권에 관한 관심이 많은 분이니 자네의 역할이 아주 크다 볼 수 있지.

사실 나는 그 문제에 관해선 자네와 그녀를 연결할 구실에 불과할 뿐이고.”

“그런데 듣다 보니까 또 의문이 생겼어요.

미래의 어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누가 결정하는 건가요?”


심각한 표정의 시몬느를 잠시 바라보던 다르망 후작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지금 당장 정확한 답을 줄 순 없네만 일단 이렇게만 알고 있게.

예전에 내가 말했듯 세상을 변화시키는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영도하는 어떤 분이 존재한다는 정도로만.

차차 자네도 속 시원히 알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그럼 이건 여쭈어봐도 될까요? 우리가 만날 그분들은 누구죠?”

“그것도 그때 직접 가서 부딪히면 절로 알게 된다네.

경우에 따라선 모르고 어떤 일을 맞는 것도 필요한 법이지.

일종의 서프라이즈 효과라고나 할까?

그리고 사실 지금 내가 말해준다고 해도 자넨 그들을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참, 자네는 어쩌면 그 시절 다른 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문젠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저 시간 여행자로 그 인물이 되어 잠시 지내다 돌아오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해서 그녀는 얼떨결에 후작과 연인이 되어 미래로 간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그 문제를 다시금 곱씹었다.


‘후작이 내게 그 일을 받아들이겠느냐고 거듭 묻지 않은 건 무슨 이유였을까?

그도 내심 나와 함께 그 과업을, 만약 그게 정말 과업이었다면, 완수하기를 바랐기에 더는 묻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는 또 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

그와 연인이 되어 한 공간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뜻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그와 연인 행세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그는 내게 어떻게 행동할까?

잠자리는? 우린 한 침대에 자게 되는 걸까? 아니면 각자 잠자리가 따로 있는 걸까?

그는 지금보다 훨씬 젊어질 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지금보다 많이 젊어진 그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만약 그와 그렇게 연인 행세를 하다 그가 정말 연인같이 느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반대로 그가 날 사랑하게 되면? 며칠 살다 보니 그곳 생활이 여기보다 더 좋아지면?

연인으로 살던 그와 헤어지기 싫어 영원히 그곳에 남게 되길 내가 원하게 되면?

만약 그가 그걸 원하게 되면? 만약 우리가 그곳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참, 그는 내게 그때 난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을 거라 말했는데 혹시 내가 미래의 나와 만나게 될 수도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누가 진짜 나인 거지?’


가슴이 벅차오름과 동시에 수많은 의문과 난제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한 마디로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둘이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 도래했고, 그들은 자정을 기다렸다 그곳으로 떠났다.

각자의 손에 시계를 들고 있다 정확히 그 시간에 맞춰 버튼을 눌렀고, 나타난 문을 통과해 그 세계로 향했다.

두 명의 시간 여행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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