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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노마드 Sep 27. 2023

소설 '할리페' 22

22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둘은 한동안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렇게 비를 피하는 동시에 다가온 사랑을 맞아들였다.

잠시 후 시몬느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후작님께 따라다니던 그 소문은 어찌 된 것인가요? 

여자를 후리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던데...”     


놀란 눈으로 시몬느를 바라보며 그가 대꾸했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난 금시초문인데. 

누군가 날 어지간히 재미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나 보군. 그런 소문을 만들어낸 걸 보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다시 그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이런 대응에 시몬느는 거듭 확신했다.


'우리 둘을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그들만의 밤이 마침내 완성됐다.     

후작과 시몬느의 결혼식은 소박하게 치러졌다. 

시몬느의 부모님과 친인척, 그리고 후작의 친인척과 모임 참가자들이 참석했고, 

엠마와 알랭이 들러리가 되어 식이 진행됐다.

물론 각지의 영주들에게선 선물과 축하 메시지가 전해졌지만, 그들을 초대하진 않았다.

외형상 결혼식은 소박했지만,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하려는 사람들로만 가득 차 분위기만큼은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었다.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후작의 특별한 모임에 참석했던 멤버 중 두 명의 장기였는데, 그건 바로 마술이었다.

먼저 남자는 보통 어른에 비해 키가 많이 작고 왜소했지만, 

실력이 워낙 월등해 모든 이들의 눈을 집중시켰다. 

그와 함께 하는 여자 역시 외모는 그와 같았지만 재치 있게 그를 보조하고 있었고, 

결정적 순간엔 그의 공연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과 그들의 재주에 탄복하면서 그들의 퍼포먼스를 지켜봤다.     


“와! 어떻게 저런 작은 몸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말이야! 정말 대단하군!”

“정말 대단한 실력이네요! 안 그래요?”     


믿을 수 없어하면서도 계속 보길 원했고, 현란한 그들의 몸놀림에 정신을 잃고 빠져들었다.

또 모임 참가자 중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유랑악사도 있었는데, 

마술에 맞춰 그가 연주하는 효과음으로 사람들은 더욱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그는 다양한 음악을 연주해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결혼의 축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정갈하면서도 맛나 보이는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마련돼 있었다.

결혼식을 치르는 당사자들도, 축하해 주기 위해 함께 한 이들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엠마와 알랭 역시 사람들 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맹세하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황홀감에 젖어 있는 듯 보였다.

길고 긴 결혼 피로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행사가 끝나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은 사람은 남아 하루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한 방에 들게 된 후작과 시몬느는 이제야 단둘만의 시간을 갖게 돼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후작이 시몬느에게 부드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 그대가 나의 신부가 된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버금가는 그런 일이요, 내겐. 

사실 난 그간 결혼은 새장과 같아 안에 있는 새는 나오려 하고, 밖에 있는 새는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모순과도 같은 거라 생각했었소.

하지만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당신과 함께 평생을 하면서 내 꿈을 함께 펼치고 싶다는 소망이 그걸 눌렀소. ”     


시몬느의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둘은 사랑을 확인하려는 키스를 막 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창문의 커튼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무사들이 방안으로 돌진해 들어와 졸지에 후작에게 두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그를 창밖으로 끌고 나갔다.

부지불식간 그런 일을 당한 시몬느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혼 첫날밤이 악몽의 첫날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르망후작은 이웃에 있는 쉐르나 왕국의 왕인 알퐁 대제 앞에 끌려와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알랭이 뱀으로 만들어버린 왕비의 아버지가 통치하는 나라에 끌려온 것이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알퐁 대제가 이성을 잃고 막말을 일삼으며 후작을 다그쳤다.     


“니 놈이 내 여식을 어찌했는지 어서 말해라. 

갑자기 사라져 버린 클라우디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듣고 보니 알퐁대제는 그녀가 사라진 건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아직 그녀가 뱀이 됐다는 건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없어진 배후에 내가 연루됐다는 건 어찌 알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그에게 스쳤다. 

그러다 언뜻 자신과 시몬느를 끝까지 뒤쫓던 왕비의 호위무사 한 명이 떠올랐다.

알랭의 올빼미가 그의 말을 공격했고, 말이 놀라며 넘어지자 함께 넘어졌던 그 호위무사가 알퐁 대제에게 고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이렇게 고하기로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위대하시고 정의로우신 대제님! 저는 정말 왕비님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의 왕국 대제님의 서거 소식에 급히 왕궁을 찾았던 저와 제 아내, 그녀는 당시엔 그저 제 집에 머물던 클라우디아 왕비님의 전 시종이었지만 바로 오늘이 저희가 결혼식을 치른 날이었습니다.

아무튼 제 말씀을 이어가자면, 우리 둘은 왕궁에 잠시 머무는 중 아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따로 있게 됐고, 

서로의 길이 엇갈렸다가 숲에서 다시 재회하게 됐지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왕비님께서 마녀와 함께 우리 앞에 등장하셨고, 

저희를 공격해 저희는 그저 무작정 도망을 치게 됐답니다. 

그러니 저희가 왕비님께 벌어진 일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후작의 말을 듣고 있던 알퐁 대제가 여전히 분노에 찬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일찍이 내 여식의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밤 생활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다. 

그 원인 또한 내게 전혀 없다곤 말할 수 없으리라. 

내가 원치 않는 내 여식에게 억지로 결혼하도록 강요했었으니 말이다. 

내 여식이 내 앞에 있다면 내가 그녈 꾸짖을 순 있겠지.

하지만 나는 내 여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아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리 내 여식이 수만 가지 악행을 저지른 악녀라 한들 여전히 내 여식이거늘, 난 그 아일 위해 뭔가를 해줘야 한다. 

졸지에 사라져 버린 그 아일 위해서 말이다. 

해서 난 널 그냥 놔줄 수 없다.

애초에 너로 인해 이 모든 사달이 벌어졌고, 내 여식이 사라져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엔 변함이 없으니.”     


그의 말에 후작이 다시 항변했다.     


“그게 대체 무슨 논리신 겁니까? 클라우디아 왕비님과 왜 절 연관 지으시는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나도 다 들은 바가 있거든. 

내 여식이 널 사모했고, 네가 내 여식을 차갑게 내쳤고, 결국 화를 못 참은 그 아이가 네 처가 됐다는 그 시종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러니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바로 너라고 할 수 있겠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제가 원인이란 말씀입니까?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어떻게 왕비님의 유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대제님께서도 잘 아실 거 아닙니까? 

대제님께서는 왕비님 외에도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셨으니 제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제님께서 품길 원치 않는 여인과 동침하신 적이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저도 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알퐁 대제가 깊은 한숨을 쉬고 난 뒤 이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일갈했다.     


“다르망 공이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고 내가 백번 양보한다 해도 난 자넬 처벌하지 않고는 밥 한술 입에 넣을 수 없네. 아비 된 도리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 호의를 말할 테니 잘 듣게. 

자넨 일단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겠네. 

내 딸을 해한 자가 누군지 그걸 밝힐 때까지 말일세.

자네에겐 좋은 대우를 해 줄 것이고, 테라스를 산책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줄 것이네. 

하지만 그만한 자유를 제외한 어떠한 자유도 용납할 수 없으며, 만약 진범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다시 내 결정을 알려주도록 하겠네.”     


다르망 후작은 이 난국을 어찌 헤쳐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앞이 깜깜해졌다. 

막 결혼식을 마치고 첫날밤을 치르려 했던 그때 이렇게 끌려오게 된 자신보다 걱정으로 날밤 새우며 마음 졸이고 있을 시몬느가 더욱 걱정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에게 간절하게 청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청만 들어주십시오.

오늘 저와 결혼한 제 아내는 저와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깊은 두려움과 제 걱정에 마음 졸이고 있을 것입니다. 

제발 제가 이곳에 있단 소식만이라도 누군가를 통해 제 아내에게 전하게 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알퐁 대제가 대답했다.     


“그것도 며칠 두고 보고 결정할 테니 일단 감옥에서 기다리게. 

때론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용기가 될 때도 있다네. 

그러니 잘 견디기 바라겠네.”     


하곤 자리를 뜨려고 하고 있었다.

다르망 후작은 다시 한번 그에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 제 아내에게 이 한 마디만이라도 전해주십시오. 제 걱정은 말고 지내라고요.”     


멀어져 가는 알퐁 대제를 바라보며 후작은 두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갓 결혼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다니?

후작은 가슴이 천 갈래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고통보다 시몬느가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며 더 고통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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