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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노마드 Sep 26. 2023

소설 '할리페' 21

21화 <어눌한 청혼>

잠시 후 두 사람은 숲의 한 장소를 정해 매트를 펴고 편하게 앉았다.     


“고요하면서도 상큼한 솔향기에 따스한 햇살까지! 완벽한 날이네요!”

“...”     


알랭의 무반응에도 기분이 한껏 업 된 엠마가 샌드위치를 꺼내 알랭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집이 아니라 제가 마련하진 못했어요. 

다음번엔 제가 직접 만든 걸 대접할 테니 오늘은 양해하시고, 이거 드세요!”     


엠마로부터 샌드위치를 받다 손끝이 스친 알랭은 볼이 발개지며 부끄러워했다.

그런 알랭을 보면서 엠마는 심장이 쿵쾅거려 더는 견딜 수가 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고개를 젖혀 햇살 가득한 맑은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 엠마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알랭이 입을 뗐다.     


“누가 만든 것인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제일 훌륭한 맛입니다.”

“제 언니요! 우리 집 대대로 내려오는 샌드위치 레시피가 있거든요. 

물론 손맛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도 하지만요. 제 거 드심 완전 기절하시겠네요?”     


샌드위치 안을 다시 꼼꼼히 들여다보다 다시 한번 감탄하며 먹고 있는 알랭의 입가에 소스가 묻었는데, 그는 그것도 모르고 완전 샌드위치 속으로 빠져 들어갈 기세로 먹어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엠마의 눈엔 그게 또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 귀여운 내 낭군님을 대체 어떤 분들이 낳았을까’란 생각이 떠올라 엠마가 그에게 물었다.     


“알랭님의 가족은 어디 계시죠?”     


그 말을 듣자 맛있게 샌드위치를 먹던 알랭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알랭의 표정을 본 엠마는 첨엔 좀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이렇게 결심했다.     


‘내가 꼭 이 남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어. 늘 웃게 만들어 주겠어.’     


엠마는 그렇게 그날 행복한 피크닉을 마치고 돌아와선 시몬느에게 숲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 주느라 밤이 깊어질 때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시몬느 역시 그런 동생을 보면서 더없이 행복해했다.     


왕은 갑작스러운 사고사를 당했고, 왕비는 사라졌다.

대제와 왕비 사이엔 후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왕국은 통치되어야 했다.

그래서 왕족들은 모여 후사를 논했고, 그 결과 왕족 중 한 명을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왕족 중 대부분은 공작 작위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세속적인 물욕과는 거리가 먼 다르망 후작은 당연히 공작 작위를 거부하고 후작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짐작하셨듯이 우리의 다르망 후작께서 물망에 올라 왕으로 추대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작 작위를 거부했듯 이번엔 왕이 되길 거부했다.

그가 왕이 되길 거부한 이유를 몇 가지 들 수 있겠는데, 

우선 그는 자신이 왕으로서 해야 할 일보단 영주로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런 말로 왕족들을 설득했다.     


“뭐라고 생각하시든 저는 왕보다 훨씬 한적한 삶에서 행해 나가야 하는 의무들도 왕으로서 귀하고 막중한 삶에서의 의무들만큼이나 간절하고 긴박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왕의 자리는 맡지 않겠습니다. 

물론 자질 면에서도 합당한 지에 대한 확신 또한 없습니다.”     


그는 충분한 소양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 이유는 그는 그때 한창 진행 중이던 종교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평소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종교인 대부분이 자기들 욕심만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어디에도 발을 붙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였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책임보다는 가당치 않은 권리만 내세우며 대신들의 당리당략에 조종되는 왕이라는 자리를 거추장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되길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정쟁에 끼여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뒤따라 어머니 집안까지 쑥대밭이 되었다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왕이 되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에 불을 붙였다.

해서 그는 왕이 되길 결단코 거부했다.

대신 그는 혼란스러운 그 시기를 자신의 이상을 넓히고 실현시키기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실험기로 정했다.

그 결과 그는 불철주야 글에 매달리던 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먼저 그간 자신이 꿈꿨던 세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선 시몬느가 꼭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까지 자신의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했었지만, 

그녀와 함께 했던 미래 여행을 통해서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주체 못 하는 대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한 여자다. 

또한, 그녀는 충동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섬세하고도 사려 깊다. 

그 무엇보다 그녀는 사랑스럽다. 

이런 그녀와 함께 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그는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해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시몬느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탑에서의 생활을 청산한 바로 그날 저녁, 그는 시몬느와 저녁을 먹은 후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갑자기 정색하는 그를 바라보던 시몬느는 순간 불안해졌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한 후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자리에 앉았다.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거 같소.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는 더 이상 상대에게 불안감을 주는 그런 관계여서는 안 된다는 말... 아니 다시 하겠소. 

나는 그대를 많이 아끼오. 그리고 더없이 귀하게 여기오. 아니, 이것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이렇게 외쳤다.     


“난 이제 그대가 아니면 삶의 의미를 못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소. 

미래로 갔을 때 내게 보여줬던 그런 다부짐으로 내 곁에서 날 지켜주시오. 

날 위해 불에 뛰어들 수 있다는 걸 평생 내게 보여주시오. 

나 역시 그대를 위해 그렇게 하리다!”     


청혼 같지 않은 청혼을 받게 된 시몬느는 내심 당황스러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실제 그보다 먼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가냘픈 한숨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녀가 입을 뗐다.     


“휴! 그러니까 지금 후작님께서는 제게 청혼을 하고 계시는 거죠? 

사랑하니 결혼합시다! 그 말을 그토록 오묘할 정도로 구사하시는 거고요.”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후작이 급하게 대답했다.   

  

“사실인즉 그렇소. 그댈 위해 헛소릴 하고 싶진 않았소. 

해서 내가 한 말은 다 진실이오.”

“네. 물론 잘 압니다. 사랑에 정석이 없듯 청혼에도 정석은 없겠지요. 

전 후작님의 청혼이 그 어느 시보다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오묘하고도 진실하면서도 그 속에 깊고도 깊은 달콤함을 간직한, 

그러고 보니 시라기보다 차라리 후작님께서 좋아하시는 잠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합니다.”     


마침내 자신의 청혼이 성공했다는 확신이 든 후작이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댄 역시 내 마음을 보름달보다도 더 훤하게 꿰고 있구려. 

그대 말마따나 우린 같은 영혼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이젠 믿고 싶어 졌소.”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하지 않은 청혼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밤은 끝난 게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과 차까지 다 마친 둘은 야외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렇게 하긴 어색해 둘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걷고 있었다.

얼마 후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둘은 정원 한쪽에 마련된 가제보 안으로 들어갔다.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후작은 뭔가 이야길 꺼내려했지만, 생각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민 중이었고, 그런 후작의 모습을 보자 또 장난기가 발동한 시몬느는 그를 한 번 놀려먹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수수께끼를 낼 터이니 한 번 맞춰보시겠어요? 이런 사람이 있었답니다. 

천성은 쾌락주의인데, 행하는 건 스토아적 절제를 실천하고 있고, 

합리적 이성을 지녔으되 격정적 감성 또한 충만해 이 둘을 교묘하게 합일하려고 꿈꿨던 자유주의자요. 

고독한 은둔자였기도 하다가 실천하는 행동주의자기도 한 이 사람은 과연 누굴까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후작의 입에서 마침내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 나의 사랑이여~ 그대를 통해 난 사랑에 대한 확신이란 걸 진정 알게 되었구려~”     


그러면서 그는 시몬느의 얼굴을 감싸 안고 한참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로맨틱하진 않아도 참으로 순수하면서도 정갈한 입맞춤이었다.

동시에 후작은 시몬느의 어깨에 부드럽게 팔을 두르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자연스럽게 시몬느는 그에게 안기게 됐고, 둘은 마치 한 몸인 듯 밀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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