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총 내려놔!”
“난 내 삶을 방해하는 페미니스트들을 그들을 만든 창조주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심하고 오늘 거사를 치렀어!”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총부터 내려놔!”
마치 로봇이 말을 하듯 그는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날 늘 화나게 만들었지. 우리 남성들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서도 한 편으론 또 여성으로서 이점도 유지하려 했지. 한 마디로 이중적인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편협한 생각일 뿐이야!”
“아니! 우리 아버지도 내게 그러셨거든. 여성은 존중해 줄 가치가 없는 족속들이라고.”
“자, 어서 진정하고 총부터 내려놓으라고.”
기남은 차분하게 그를 달래려 했다.
그때 갑자기 그가 총구를 자신의 입에 넣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기남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곧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기남은 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기남이 정신을 차려 보니 대학 내 간호사실인 듯한 곳에 자기가 누워있었다.
곁엔 선배 설윤과 정완수가 불안한 얼굴로 기남을 지켜보다 그가 깨어나니 안도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남아! 괜찮아?”
“정말 큰일 날뻔했어! 근데 지금 네 덕분에 사람들 목숨 구했다고 여기 매스컴에서 인터뷰하자고 난리야!”
기남은 정신은 들었지만, 막상 몸을 일으키기가 꺼려졌다.
왜냐면 자기에게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올 게 뻔했는데 거기에 일일이 대응하기가 귀찮아서였다.
더불어 자신이 위급한 상황에서 외국어를 능통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걸 어찌 설명해야 하는지에서부터 한낱 여행자가 겁 없이 살인자를 마주하고 그와 대화할 수 있었는지 등등을 설명하기가 벅찼기 때문이었다.
기남은 하루라도 빨리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어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기남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일행이 간호사실을 나서는 순간 수많은 취재진이 그들을 에워쌓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기실 수 있었나요?”
“그 살인마랑 직접 대화를 나누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대담한 행동을 주저 없이 할 수 있었죠?”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기남은 차분하게 그들의 질문에 불어로 대답했다.
그런 기남을 바라보는 설윤과 정완수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묻어있었다.
얼마 동안 그들의 질문 공세를 받던 기남이 모든 답변을 마친 후 정완수와 설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무 피곤하다. 어서 가서 쉬고 싶어요, 형! 완수야!”
그들은 선배 설윤의 집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아무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급기야 정완수가 입을 뗐다.
“근데 너 왜 말 안 했어? 너 불어 할 줄 안다는 거?”
“어, 그게...”
“와! 내가 여기 온 지 2년이 넘었는데 너 오늘 불어하는 거 보니까 난 완전 쪽팔려서.”
“형! 그게...”
“뭐 완전 네이티브 수준이던데? 근데 이상하긴 해! 너 국경 넘을 때만 해도 불어로 된 간판을 읽지 못했었는데....”
“...”
“단 삼일 만에 불어를 뗐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도저히 이해 불가야!”
“...”
“혹시... 기남이 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 아닐까? 아님 만화에 나오는 그 뭐야? 그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 뭐 그런 거?”
설윤이 이렇게 농담을 하자 정완수와 기남 두 사람 눈이 놀란 토끼눈으로 변했다.
정완수는 아무 뜻 없이 그냥 일상적인 리액션이었지만, 기남은 달랐다.
혹시나 하면서 그는 심장이 쫄깃해졌고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
즐거운 여행과 함께 색다른 경험을 마치고 기남과 정완수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기남의 인터뷰는 기사화돼 신문에도 났고, 기념으로 정완수는 그 신문을 들고 오자고 했다.
쑥스러운 기남은 거절했지만, 기어이 정완수는 신문 몇 부를 차에 실었다.
신문 기사에는 기남이 수십 명의 생명을 살린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때 만약 기남이 살인자에게 말을 걸고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그는 더 많은 생명을 무고하게 희생시켰을 거라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기남은 생명이란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 편으론 찜찜함을 지우지 못했다.
자기가 좀 더 냉정하게 잘 대처했더라면 정신이 아팠던 살인자는 스스로 목숨을 끝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날 기남은 이 문제를 선배 설윤과 정완수와 토의했었다.
그때 설윤은 기남에게 자기 의견을 이렇게 피력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자넨 이성이 너무 앞서서 그게 혹 탈이 될까 걱정스러워! 살인자는 살인자일 뿐이야! 무고한 생명을 그렇게 해친 자가 자기 목숨은 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뭐지?”
“그게... 전 누가 됐든 사람 목숨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당장 보이는 그것만 봐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왜 그렇지?”
“어제 그 일이 있고, 오늘 신문을 보니 그 남자에 관한 기사가 있더군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받아왔고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문제 아닐까? 부모에게 학대받은 모든 이가 다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지!”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어떤 인간을 만드는 건 아주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것이라고 평소 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인간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그리 단순하지 않죠. 어떤 이에겐 아무렇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큰 기폭제가 되어 나비효과를 이루기도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나비효과라!~”
“네. 제가 읽었던 어떤 책에서 전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어떤 살인자는 뚜렷한 이유 없이 그저 겁만 주려다가 자신에게 겁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비루함이 느껴져 그들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린 그걸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요?”
“아! 너무 깊게 들어가진 말자고! 우린 모두 바빠서 그렇게 깊게, 남의 머릿속을 헤집을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까!”
“그게 바로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애정 결핍이 이런 종류의 사건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일종의 증오범죄 말이죠!”
“증오범죄?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군!”
어찌 보면 선배 설윤은 가장 보편적인 사람이었다.
어쩜 기남이 과거의 일들과 특이한 경험, 즉 미래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오는 일을 겪지 않았다면 그 역시 설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기남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어왔고, 생각이 유난히 많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환경적 요인을 무시하진 못할 터였다.
이런 기남과 설윤의 대화를 정완수는 별생각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 정완수에게 설윤이 물었다.
“완수 자네 생각은 어때?”
“저요? 전 그냥 인생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자, 주의라서요. 나만 생각하고 살자는 아니지만, 생각이라는 건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을 수도 있어서 되도록 생각 없이 살려고 노력 중이죠. 흐흐.”
“그게 속 편하지! 나도 그러고 싶거든. 그래서 일부러라도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또한 한 사람의 특질일 듯싶어요.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된다기보다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에게 받는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전!”
“그럴 수 있겠지. 암튼 중요한 건 우리가 아는 사람이 살인자를 자제시켰다는 거 아니겠나? 흐흐.”
“네. 전 이 친구 이번에 정말 또 다른 면을 봤습니다. 공부만 하는 범생이가 아니라 행동까지 하는, 뭐랄까? 알아두면 평생 유익한 그런 친구라는 걸요! 흐.”
기남은 자기 앞에서 대놓고 자길 과찬하는 친구 정완수 때문에 많이 쑥스러웠다.
그래서 슬며시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갔다.
그 사이 설윤이 정완수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자네 아버지 회사 물려받으면 저 친구 꼭 옆에 두라고. 아주 쓸모가 많은 친구 같아!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사람 진국 같거든! 요즘 보기 드문!”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 이미 그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남은 자기 아버지가 규모가 제법 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대표라는 말을 정완수에게 하지 않았다.
해서 정완수는 기남을 자기 회사에 채용해 언젠가 자기가 회장 자리에 앉게 되는 그날까지 곁에 두고 그의 능력을 활용해야겠다고 작정했다.
어느 날 기남과 정완수가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고 있는데 한 유학생이 기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건방진 어투로 기남에게 물었다.
“그쪽이 남기남인가?”
“그런데 누구시죠?”
“나! 나도 유학 온 학생이지 뭐! 이름은 최영태고.”
“근데 무슨 용건이라도....”
“보아하니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니까 말 놓을게. 부탁 하나 하고 싶어서.”
“?”
“미안하지만 저 친구 빼고 우리 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