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성북동집을 방문한 기남 앞에 정남이 나서며 거들먹거렸다.
“미국 유학도 다녀오셨겠다.... 곧 회사도 차린다지? 돈은 어디서 나서?”
그의 말에 대응할 가치를 못 느낀 기남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마침내 그가 목청을 돋궜다.
“야! 이젠 대놓고 날 무시하겠다는 거야, 뭐야? 왜 말이 없어?”
옆에 있던 진희까지 나섰다.
“흥! 지가 누구 덕에 오늘날 이렇게 된 줄 모르고.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정남이 다시 기남을 향해 막말을 시작했다.
“너 오늘 나랑 한번 결판내볼래? 그동안 아버지 봐서 참았는데”
“그래! 오늘 내가 널 완전 딴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기남이 점잖게 대응했다.
“뭐라는 거야, 지금, 이 새끼가!”
정남이 기남의 멱살을 잡으려고 기남 가까이 다가오다 외마디 소릴 내질렀다.
“아! 아!”
갑자기 그가 무릎을 꿇더니 고통스러워했다.
놀란 진희가 정남에게 달려와 그를 보다 기남에게 도끼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너 지금 우리 정남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제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예요!”
기남이 평상심을 지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곧 정남이 툴툴 털고 일어나더니 진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배고파요.”
정남의 어투나 태도가 지극히 공손해져 있었다.
죽자 아프다던 아이가 갑자기 변화된 모습에 놀란 진희가 입을 헤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어머니! 제가 차려 먹을까요?”
정남이 주방 쪽으로 자릴 옮기려다 기남에게 말했다.
“형도 나랑 같이 밥 먹을래?”
진희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정남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등짝을 스매싱했다.
“야, 정신 차려! 남정남! 너 왜 그래?”
“어머니! 아파요!”
곧 울음을 터트린 거 같은 모습으로 그가 등을 쓰다듬었다.
진희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집안으로 들어오던 남두철이 기남을 보자 반가워하며 입을 열었다.
“기남이 왔구나! 내가 좀 늦었다!”
“흥! 기남이, 기남이! 당신 아들 정남이 좀 그렇게 챙겨봐요!”
진희의 앙탈에 남두철이 또 그러네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녈 한 번 쳐다보더니 기남 곁으로 다가왔다.
“밥 아직 안 먹었지? 우리 밥 먹자!”
남두철이 기남 어깨에 손을 얹고 둘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간 남두철이 놀란 눈으로 정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남아! 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제가 식사 차려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담담해 보이는 기남을 향해 남두철이 무슨 일이냐는 식의 눈빛을 보냈다.
기남은 그저 어깨를 들썩이면서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남아! 너 괜찮아? 너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야?”
“아뇨! 형하고 아버지 밥상 제가 차리고 있으니까 잠시만요!”
마치 여자라도 된 듯 사근사근한 어투로 정남이 응답했다.
뒤따라온 진희가 기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새끼! 분명 이거 악마 새끼야! 왜 내 아들이 갑자기 저렇게 된 거냐고?”
남두철이 진희를 말렸고, 기남은 가만히 그대로 서 있었다.
식사 후 서재로 자리를 옮긴 남두철이 입을 열었다.
“혹시 너 말이야.”
말을 하다 말고 남두철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기남이 입을 뗐다.
“네! 제가 인간 개조 좀 했습니다!”
“뭐라고? 정말이야? 그게 어떻게 가능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남두철이 기남을 바라봤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제게 그런 능력이 생겼어요, 아버지!”
“아니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저도 첨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사실이에요.”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아버지 고심을 덜어드리려고 정남을 제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근데 너무 힘을 썼나 봐요. 이젠 아예 남성스러움이 다 사라져 버린 듯 보이네요.”
“...”
“아버지 평생 울린 여자들에게 회개하는 맘으로 정남이 돌보시기 바래요!”
“나도 나지만 정남 에미...”
“그 여자 또한 평생 지은 죗값을 받는 거죠.”
“그렇긴 하다만...”
“때론 돌이킬 수 없는 일들도 있어요. 마지막 선을 넘는 경우 더 이상 자비는 없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아버지!”
“...”
“이제 아버지 회사 일 도와드리는 거 끝나고 나면 당분간 여기 찾아오는 일 없을 거예요. 그렇게 아세요!”
“아니 왜? 나랑 완전 인연을 끊겠다는 건 아니지?”
“당분간은 찾아뵐 수 없단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제 내게 남은 희망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손주도 보고 싶고...”
“기다리세요! 기다리시면 그런 날 올 거예요!”
기남은 어느 날 진희가 탄 차를 따라갔다.
진희가 호텔 앞에서 내리더니 발레 파킹을 부탁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남 역시 차에서 내려 발레 파킹을 부탁하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진희가 엘리베이터를 탔고, 기남도 따라 탔다.
이미 기남은 변장을 하고 있어 진희는 기남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11층에서 내린 진희가 룸으로 향했다.
기남은 조금 거리를 두고 그녀가 도착하는 룸을 확인했다.
잠시 후 큰 선글라스를 착용한 신인 가수 XX가 룸 앞에 도착했다.
사방을 둘러보던 그가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진희가 가수의 목에 매달리며 까치발을 하고 교태를 부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쪄!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쪄!”
“아이, 여기서 이러지 말라니까! 사람들 보면 어쩌려고 그래!”
귀찮아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투정을 부리며 그녀를 안으로 밀었다.
그리고 자기 몸도 룸으로 밀어 넣으며 곧 문이 닫혔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기남이 잠시 후 그 룸 앞에 섰다.
그리고 결심한 듯 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벌거벗고 탐닉에 몰두했던 두 사람은 혼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
“당신 누구야?”
“어머머! 어떻게 들어온 거야?”
두 사람 앞에 선 기남은 다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뻘 되는 여자랑 대낮부터 뒹구니 좋아? 그리고 아줌마! 아들뻘 되는 놈이랑 붙어먹으니까 좋냐고?”
두 사람이 각자 몸을 가리느라 서로 이불을 빼앗고 난리를 부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수란 놈은 기남이 카메라를 들었는지부터 살폈다.
진희가 머리를 다듬으며 대차게 말을 받았다.
“사랑에 나이가 어딨어? 우린 엄연히”
“사랑이라! 그런 숭고한 단어를 어디다 갖다 붙이고 있는 거야 지금! 이게 사랑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때 가수란 놈이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나섰다.
“저기요! 돈이 필요해서 그러세요?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줄 테니 제발”
“돈? 넌 돈이면 뭐든 다 되나 보지! 이 아줌마가 누군지 알아? 바로 내 아버지 부인!”
기남의 이 말에 진희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남이라는 걸 알아보곤 소리쳤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가? 바람피우는 남편에 맞불을 놓으시겠다?”
“니가 뭔데 내 사생활을 간섭해? 니 아버지도”
“사실 상관하고 싶진 않아! 다만 집안이 좀 조용해졌음 해서 말이야.”
“뭐라고? 그게 뭔 그지발싸개 같은 소리야?”
“이런 현장을 들키고도 여전한 걸 보면 당신 멘털 참 대단하긴 해!”
“뭐 어째? 니가 나 멘.... 암튼 뭐 보태준 거 있어?”
“누가 화류계 출신 아니랄까 봐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그때 가수란 놈이 끼어들었다.
“뭐? 화류계 출신? 아버지가 화성 대표라며? 거짓말한 거야, 나한테?”
“그런 넌 뭐 나한테 거짓말한 거 없어?”
질 새라 진희가 자기 상간남에게 대들었다.
둘이 그러는 꼬락서니가 한심스러워 기남은 자릴 뜨기 위해 마지막으로 진희에게 일침을 놓았다.
“내가 적나라한 광경 다 봤으니까 이제 좀 자중하도록! 알겠지?”
“흥! 나도 이판사판이야! 니 아버지랑 이혼하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이 인간이 당신이 이혼녀라도 만나줄까?”
“당연하지. 우린 사랑하는 사인데.”
“그렇다면 내가 또 증거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군! 자, 상간남 당신 속마음을 그녀에게 말해줘야겠어!”
“응? 내 속마음?...”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입에서 방언하듯 말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내가 뭐 이 짓 좋아서 하고 있나, 내 엄마보다 나이도 많고, 살도 축축 늘어지고, 눈가에 주름도 자글자글하지만, 돈푼 좀 있는 집 마누라라 나 계속 뜨게 해 준다고 하니까. 얼마 전엔 차도 한 대 새로 뽑아줬고 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도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지껄이는데, 진희가 화난 표정이 역력해지더니 그 남자 머리통을 베개로 내리쳤다.
“야, 이 새끼야! 니가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니가 얻다 대고 감히 날!”
“아니, 왜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뚫린 아가리라고 계속 지껄여보시겠다? 너 오늘 나한테 죽어봐라!”
“아! 아! 아이씨 정말!”
남자는 계속 맞고 진희는 열 내며 열심히 그놈을 패주고 있었다.
그 꼴을 더는 보기 뭐 해 기남은 밖으로 나왔다.
그 정도면 이미 자기에게 약점 잡힌 진희를 충분히 혼내줬다고 생각했다.
못 볼 꼴을 의붓아들에게 들킨 것, 그리고 상간남으로부터 자기가 그저 물주 노릇밖에 한 게 없다는 그의 진심을 들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여자로서 끝난 거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