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은 이번엔 자신이 직접 현장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연주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마지막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유학 시절 만났던 인연을 통해 방송국 고위 관계자에게 도시가스에 관한 전반적인 특별 방송을 만들도록 지시하는 거였다.
이제 사고까지는 한 달 남짓 남아 있었다.
사고 발생 1주일 전, 도시가스에 관한 특별 방송이 전파를 탔다.
도시가스를 다루는 사람들의 경각심은 물론 주택가에 들어서 있는 가스공급 기지의 위험성이 등이 부각됐다.
가스 누출을 감지할 수 있는 가스 검지기에 대한 중요성도 특별히 방송에서 강조됐다.
또한, 그 기지를 담당하는 실무진들의 턱없이 부족한 숫자에 대한 취재를 통해 관리 체계에 대한 통합적인 문제점도 지적됐다.
방송을 본 기남은 다행이라 여겼다.
이 정도면 적어도 1주일 후 사고는 방지할 수 있을 거라 기남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실제 벌어졌던 날이 됐다.
그날 기남은 회사 회의실에서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바로 얼마 전 이사가 된 최준혁과 이준호를 비롯해 부장이 된 홍경진, 유진현과 함께였다.
그들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엔터테이너를 양성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건립하는 문제를 의논하는 중이었다.
한참 논의하던 중 기남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보통 회의 중 기남은 핸드폰을 꺼놓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깜박했다.
기남이 화면 전화번호를 보곤 양해를 구했다.
“전화 좀 받고 다시 시작하죠.”
기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화를 받았다.
<어, 웬일이야?>
<너 지금 TV 켜봐. 그리고 속보 뜬 거 봐봐!>
정완수가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남이 회의실에 마련된 TV를 켰다.
화면 속엔 ‘아연동 공원 가스 폭발 사고’라는 큰 로고와 함께 속보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너가 염려했던 게 사고로 이어졌어. 어떻게 설명할 거야?>
정완수는 밥 먹던 날 기남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말을 이었다.
<배관 매립 사업 얘기하면서 너가 했던 말 기억해?>
<그럼. 기억하지.>
기남이 힘없이 대답했다.
<너가 지적했던 바로 그 문제로 폭발 사고가 터진 거, 말 되냐?>
다시 기남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아무래도 이상하다, 난.>
<...>
<아니다! 됐어! 너도 많이 놀랬지?>
<그러네. 기어코 터졌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도 모르게 통화를 마친 기남이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TV 화면을 같이 보고 있던 네 사람 역시 많이 놀란 듯 보였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죠?”
“글쎄 말이야! 가스공급 기지가 주택가에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최준혁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아니, 상근자가 겨우 3명이었다는 건 또 뭐야? 그게 말이 돼?”
“직접적인 폭발 원인은 가스 누출이라는데 사고 전에 점검했는데도 또 누출됐다는 건 또 뭐야?”
그들 의견도 TV에 나온 다른 이들과 일치했다.
방송에서는 전문가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반응까지 보여주면서 대참사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기남은 벌어질 일은 결국 벌어진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신념까지 버려가면서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건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지난번 성주대교 사건에선 희생자를 많이 줄인 게 사실이지만, 이 사건에선 자신의 노력은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었다.
상대의 의중을 꿰뚫고 사고체계를 바꾸고 마음을 움직이던 능력도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능력은 단 하나다.
그 능력을 쓸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다른 두 가지 능력은 사라졌을 수도 있다.
어학 능력과 어마무시한 괴력.
기남은 힘이 빠졌다.
정확히 자신의 무력함 때문인지, 아니면 끝없이 벌어지는 사건 사고 때문인지 암튼 몸 안의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 들었다.
‘그거 하난 확실하군! 현장에 내가 없으면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거!’
기남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없어지고 싶었다.
그때 기남의 핸드폰 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연주였다.
많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연주가 물어왔다.
<여보! TV 봤지? 지금 어쩌고 있어?>
<나? 힘이 빠지네. 그렇게 애썼는데 하나도 막지 못했으니.>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그런 거 원래도 그랬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아직 확실히 사망자와 부상자, 물질적 피해가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 모르지. 똑같을 거 같아.>
기남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 말은 당신이 현장에 없으면 변하는 게 없단 얘기네. 그렇지?>
<응. 그런 거 같네.>
<아... 미안해! 내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큰 피해가>
기남이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이번에도 내 결정이었어. 당신 탓 절대 아니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래도... 너무 엄청난 사고다 보니 나 스스로를 원망하게 돼.>
<아니! 그러지 마!>
연주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숨을 죽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 마음 지금 그럴 테니까 이만 끊을게.>
<그래. 이따 봐.>
전화를 끊은 기남의 대화를 듣던 네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간간이 들리는 대화에서 아무래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고와 대표가 뭔가 연관성이 있는 듯해 의아한 거였다.
그때 기남이 입을 뗐다.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죠.”
“네?”
네 사람 중 이준호 이사가 반문하자 최준혁 이사가 눈짓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다들 이만 나갑시다.”
최준혁 이사 말에 세 명이 차례차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목례를 갖추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혼자된 기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때 갑자기 기남에게 두통이 찾아왔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기남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뭔가 떠오른 듯 즉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맞아! 넉 달 후 또 다른 폭발 사고가 있었어!
이번 사고보다 인명 피해가 훨씬 많았어!”
기남은 이번엔 절대 자신의 숙명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지난번처럼 윗사람을 만나 건의하거나, 계도하는 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된 기남은 이번만큼은 현장에 직접 가 희생자들을 최대한 줄여볼 요량이었다.
그전에 그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가스공사 이사장에게 전화했다.
비서를 통해 통화를 시도한 기남은 한참 기다린 후 그와 통화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정신이 아닌데 또 왜, 뭣 때문에 전화한 거요?>
<속보 보셨겠지만 제가 말씀드린 거 다시 한번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아버지 회사와 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가스관 매설을 좀 더 깊게 하셔야 합니다.>
한동안 생각하던 그가 내뱉었다.
<그런데 말이요. 참 이상하지 않소?
하필이면 왜 그쪽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그대로 일이 똑같이 발생했는지 말이요.
그쪽이 기획사 대표가 아니라면 영락없이 이번 사고를 일으킨 주범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 거요. 안 그렇소?>
기남은 기가 막혔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소지도 있긴 했지만, 그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 경제적 손실을 눈앞에 두고 사고의 원인이 된 가스공사 수장이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기에 말이다.
더는 그와의 시간이 낭비라고 느낀 기남은 할 말에 방점을 찍는 걸로 마무리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들어보셨죠? 혹시 제가 드린 말씀을 무시해서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난다면 그땐 정말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기남은 넉 달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남이 기억하기에 다음에 터질 사고 또한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인재였다.
며칠이 지난 뒤 기남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건설감리협회죠?>
<네. 그렇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X구백화점 공사 현장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어 전화했습니다만 어느 분과 통화를 해야 할까요?>
***
기남은 자신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 해야 할 일은 일단 다 했다고 여겼다.
건설감리협회에 전화해 담당 공사 업체가 굴착공사 전 지하 매설물 대장 및 도면에 표시된 위치를 정확히 조사하고 인력굴착으로 재확인했는지, 지하 매설물 매설깊이 재확인과 줄 파기 작업 시 지켜야 할 안전대책은 잘 지켰는지, 그 밖에 가스관이나 상하수도관 지하 매설물에 관한 안전대책은 물론, 지하 매설물별로 관계자와 협의 및 확인을 시행했는지, 지하 매설물 근접 굴착공사 시 매설물 관리자 입회하에 실시했는지, 안전 통로 등 지하 매설물 방호상태 점검시설을 확보했는지, 지하 매설물 파열 시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대책은 확립됐는지, 지하 매설물의 진동 방지 대책까지, 광범위하게 감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고 며칠 전에는 공사 현장 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 중 몇 곳에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저... 옆에서 공사하고 있는데 공사로 인해 지반이 약화된다는 거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아, 물론 제가 있는 건물에서도 그런 게 느껴져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다 같이 단체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당연히 공사 업체에 항의해야죠. 그리고 공사 준수사항 다 지키면서 하고 있는지도 물어봐야죠.>
이런 통화로 기남은 주변 건물에서 공사 업체에 항의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아무런 허가도 받지 않고 천공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였다.
해서 기남은 사고가 발생한 삼일 전, 출장을 핑계 대고 현장으로 떠나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출장을 앞둔 기남이 연주에게 외식을 제안했고, 둘은 오랜만에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