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의 말을 다 들은 연주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내 말 안 들을 게 뻔한데 말려봤자지. 안 그래?”
“어? 그럼 허락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내 남편은 정의의 사도니까!”
“아, 연주야! 정말 한시름 놨다! 나 정말 고민 많이 했거든.”
“왜? 나 때문에?”
“당연하지! 내 아내는 소중하니까!”
둘은 가끔 이렇게 말장난하는 걸 즐겼다.
연주가 기남의 말에 곱게 눈을 흘기며 덧붙였다.
“정말 위험한 거 아닌 건 맞는 거지?”
“그렇다니까. 내가 위험할 일이 전혀 없어. 난 그냥 가스 점검하라고 닦달만 하면 되니까.”
연주가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전혀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닦달한다는 거지?”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어.”
“그게 뭔데?”
“그것까진 말하기 좀 그렇고... 일단 날 믿어!”
기남은 하기 싫지만, 일종의 꼼수를 부리기로 했다.
정완수에게 부탁해 정완수 큰 형과 대학 동기동창이라는 가스공사 이사장과 밥 한번 먹자는 의견을 전달했다.
가스공사 이사장을 만나 아버지 사업을 청탁하는 척하며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사안들을 건의할 참이었다.
얼마 후 정완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남아! 우리 형이 좋단다! 유명 기획사 대표님께서 제안하시는 건데 거절할 수 없다면서. 흐흐.>
<그래? 잘됐네. 분명 가스공사 이사장님께서도 나오시는 거겠지?>
<그럼! 형이 일단 다 어레인지하고 연락 준다고 했어.>
<그래. 장소는 좋으신 데로 결정하시라고 말씀드려. 그리고 너도 나올 거지?>
<나까지?>
<당연하지 인마! 지난번에 애써준 것도 있고, 당연히 너도 같이 해야지.>
<그럼 그럴까? 근데 너 원래 누구한테 청탁하고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웬일이냐?>
마침내 식사 자리가 마련된 한정식집 앞에 도착한 기남은 숨을 가다듬었다.
부디 일이 성사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남은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방에는 네 명의 자리가 정갈하게 마련돼 있었다.
통창 너머 단정하게 조경된 뜰채가 보였다.
잠시 후 정완수가 형님과 이사장을 모시고 안으로 들었다.
“어, 벌써 와 있었네!”
정완수의 말에 기남은 정중하게 그들을 맞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완수 형은 호감형이었다.
정완수 말대로 놀기 좋아하는 한량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반면 가스공사 이사장은 대단히 엄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그건 첫인상만을 봤을 때 해당 되는 거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 보였다.
넷은 착석했고, 가벼운 담소를 이어갔다.
잠시 후 서빙을 해주는 도우미가 들어왔고, 또 잠시 후엔 주방장이 특별식이라는 걸 들고 직접 내실을 찾았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곳 주방장을 맡고 있는 김 XX라고 합니다.”
“멋진 곳입니다! 음식 또한 기대해도 되겠죠?”
역시 정완수 형이 호탕하게 말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가스공사 이사장이란 사람은 말없이 그저 은은한 표정을 유지했다.
주방장이 음식을 앞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산지 직거래한 곳에서 방금 받은 걸로 만들어봤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아, 뭘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잘 먹죠!”
이번에도 정완수 형이 맞장구를 쳤다.
주방장이 나가고 서빙 도우미가 음식을 나눠 각자 접시 앞에 내놓았다.
음식 맛을 본 정완수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와! 훌륭한데요?”
“그러네! 여기 처음인데 기대 이상이네!”
정완수 형이 동의를 구하는 듯 가스공사 이사장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지난번 왔을 때에 비해 더 낫군! 아무래도 유명하신 분이 오셔서 그런가?”
기남을 의식하는 듯한 말이었다.
기남은 예를 갖춰 말했다.
“제가 신경 좀 써달라고 미리 언질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래요? 어떤 언질이었죠? 허허.”
가스공사 이사장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중요한 미팅이라고 했죠.”
“아, 그래요?”
다소 실망한 빛을 보이며 가스공사 이사장이 먹기를 계속했다.
그때 정완수 형이 나섰다.
“근데 말이요. 참, 동생 친구니 말을 좀 낮춰도 되겠소?”
“아, 물론입니다. 편안하게 말씀 낮추십시오.”
“그럼 그럴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보자는 식으로 정완수 형이 편한 자세를 취했다.
“거기서 나오는 노래 나도 좀 들어봤는데... 너무 젊은 애들 취향 일색이더란 말이지.
우리 같은 노땅들을 위한 노래도 좀 만들어주면 좋을 거 같은데.”
“네. 명심하겠습니다. 일단은 트렌드에 맞추고 있습니다만 좀 더 회사가 안정권에 들게 되면 여러 장르를 고려해 봐야죠.”
“돈 되는 거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허허.”
가스공사 이사장이란 사람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뭐 그것도 무시하지 못하긴 합니다. 하하!”
기남이 솔직하게 말을 잇자, 가스 공사 이사장과 정완수 형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때를 맞춰 정완수가 입을 뗐다.
“내 친구라 그런 게 아니라 이 친구는 기업 윤리 하나 똑 부러집니다.”
“기업 윤리?”
가스공사 이사장이 역시 궁금하다는 식으로 물어왔다.
“아까, 말로는 트렌드 맞춘다고 했지만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죠. 강력한 메시지도 전달하면서요.”
“강력한 메시지라...”
이번에도 가스공사 이사장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그 메시지라는 게 우리 같은 사람 들어보라는 그런 얘기 말하는 겁니까? 뭐라더라? 꼰대 의식이라고 하던가?”
어법은 최대한 예를 갖췄지만,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기남은 자기 철학을 논하러 나온 자리가 아니기에 최대한 자길 낮춰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말씀드렸다시피 경제적인 걸 무시하지 못하다 보니”
그때 눈치 없게 정완수가 또 끼어들었다.
“아니 너 왜 그렇게 말해! 그게 아니잖아!”
정완수 형이 눈치 있게 매듭짓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것이었지만 다행히 그가 호탕하게 화제를 돌렸다.
“우리 반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남 대표?”
“네. 좋습니다! 뭘로 할까요?”
집으로 돌아온 기남은 고민에 빠졌다.
사고를 막기 위해 이사장까지 만나 애써봤지만, 결과는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정완수 형이 기남을 불렀다.
“저 친구가 좀 그래.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꼬이고 막히고 그런 부분이 있지. 너그러이 이해해.”
“아닙니다! 형님께서 오늘 애 많이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나야 밥만 잘 얻어먹었지.”
그때 화장실에 갔던 정완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니 가스공사 이사장인가 뭔가 하는 인간 왜 그 모양이야, 형? 학교 때 그 사람하고 친했어?”
“친하긴. 그때 걘 공부만 그저 파느라 친구들 얼굴 기억하는 애 한 명 없을 거다.”
“그래? 어쩐지. 사회성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더만! 지 말만 말이라고 여기고 말이야.
쯧쯧. 저런 사람이 이사장이라니. 아랫사람들 많이 힘들겠다.”
“그래도 성공했지. 공기업 최고까지 됐으니.”
“암튼 난 저 사람 정말 맘에 안 들던데 기남이 너는 그래도 잘 참더라.”
정완수 말에 기남이 그냥 웃어넘겼다.
“공사 이사장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건가?”
정완수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했다.
그때 정완수 형이 어렵게 다시 입을 뗐다.
“이런 말 전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저 친구가 다음엔 술 한잔했으면 하는 거 같던데.”
“뭐? 술?”
정완수가 소릴 높였다.
“혹시 딴 거 기대하는 거 아니야? 연예 기획사라고 하니까 뭐 여자라도 소개해 달란 그런!”
“그게... 나도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긴 했어.”
정완수 형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완수가 다시 열난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기남아! 관둬라! 가스 배관 매립공사 해서 얼마나 번다고? 네 아버님 사업체 탄탄하신데 그거 안 해도 문제없잖아?”
“내 생각도 그렇긴 해.”
정완수 형도 동감을 표하며 한 마디를 보탰다.
“쟤가 학창 시절엔 죽어라 공부만 하더니 다른 애들 말에 의하면 여자를 그렇게나 좋아한다네? 나만큼이나! 허허.”
그 말에 기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정완수 형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술이라고 했으니 일단 술자리 한 번만 더 만들어주세요. 그다음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형님!”
“어? 그 말은...”
“아니! 기남이는 그럴 사람 아니야, 형! 쟤만 그냥 믿으면 돼!”
그리고 며칠 후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가스공사 이사장은 기대에 한껏 부푼 얼굴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룸살롱의 한 방으로 안내된 그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룸을 보더니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바쁜 사람 오라고 하더니 뭐 하는 겁니까?”
기남이 무슨 소린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이 사람아! 술이라는 게 꼭 술만을 말하는 건가? 답답하긴!”
“네?”
“사업하는 사람이 이렇게 답답해서야! 연예인들 다루는 사람 맞아?”
“??”
기남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생각을 바꾸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기남은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변하지 않은 태도와 목소리로 기남에게 호통쳤다.
“당신! 나한테 청탁하는 사람 맞아? 날 만만하게 봤나 본데”
“무슨 말씀이시죠?”
“가스 배관 매립 공사? 그리고 자네가 주택가에 가스공급 기지 놓는데 보태준 거 있어?
그리고 배관을 얕게 묻던, 깊게 묻던 뭔 상관이야? 안전 점검 인원을 늘려?”
그가 앞뒤 맞지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흥분했다.
기남은 공기업 수장이란 사람의 수준에 기가 막혔다.
다른 방법을 간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기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