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기남은 다음에 일어날 사고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 사고 또한 성주대교 사고처럼 천재라기보다는 인재였다.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된 지역에서 벌어진,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 사고였다.
당장 도심 한복판에 설치된 가스공급 기지를 옮긴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해서 기남은 가스공사 측에 일단 관리자 인원부터 확충하라는 말을 전하고자 했다.
이번 사고뿐만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사고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건 역시 그곳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것일 터였다.
이번 일에도 기남은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 기남은 일단 박흥식에게 전화부터 넣었다.
<형, 잘 지냈어?>
<나야 뭐 네 덕에 잘 지내고 상도 잘 받고 그랬지. 흐흐.>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또 부탁이 있는데...>
<이렇게나 빨리 또 사고가 일어나는 거야?>
박흥식이 놀라며 외쳤다.
<응.>
<아이쿠! 큰 사고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내가 너한테 보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 다 말해라! 이번엔 뭐냐?>
<가스공사 측에 연락해 아연동 일대 도시가스 공급지 인원 좀 대량 확충하라고.
그리고 이전보다 점검 자주 하라는 말도 꼭 전해야 하는데 말이야.>
<가스 폭발인가 보구나? 그렇지?>
<응.>
<와! 이거 또 큰 사고겠구나! 으음...>
박흥식은 어떤 루트를 통해 연락을 취해야 할지 가늠하는 듯했다.
<사고까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어. 그러니까 서둘러야 할 거야.>
<알았어. 일단 내가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 볼게.>
<고마워, 형!>
<또 그 소리! 인재를 막는 일에 날 동참시켜 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지.>
<진행되는 상황 보고 또 연락하자, 형!>
<그래!>
통화를 마친 기남은 제발 이번 사고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일개 검사장이 어디까지 손을 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선 박흥식을 믿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기남의 머릿속에 문득 정완수가 떠올랐다.
그의 집안을 통해서도 어쩌면 가스공사까지 줄이 닿을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희망이 느껴졌다.
즉시 기남은 정완수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대표님! 어쩐 일이신가요?>
그는 농담으로 시작했다.
<완수야! 너한테 또 부탁할 일이 생겼다!>
<근데 말이야, 친구야! 이렇게 말하기 좀 뭣하긴 하지만 왜 네가 있는 곳엔 늘 사고가 있는 걸까?>
<...>
<보통 이렇게 말하면 아주 재수 없는 놈이란 뜻이잖아! 근데 넌 반대야! 네가 있는 곳에 사고가 있긴 한데, 너 같은 경우는 대부분 해결하거나 축소시키지. 왤까?>
<...>
<캐나다 갔을 때도 그랬고, 얼마 전 너가 부탁해 만났던 최 회장도 이번 성주대교 붕괴사고랑 접점이 있는 사람이었고, 사고 현장에는 또 너가 있었고 말이야.
나한테 진실을 말해 주면 안 되겠니?>
<완수야!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거야.>
<어! 그 얘긴 뭐가 있긴 있다는 거군! 그렇지?>
<내 얘기부터 좀 들어주면 안 될까?>
기남은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그리고 재빨리 자기가 해야 할 말만 하곤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었다.
친구에겐 많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기남은 직접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연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아기를 잃고 힘든 사람한테 내 걱정까지 시키는 건 정말 아닌데...’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엔 묵직한 뭔가가 매달린 듯 편치 않았다.
물론 기남은 그 정체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책임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거였다.
‘제발 참자, 남기남! 연주를 위해 하나는 해줄 수 있잖아! 그렇지?’
그는 박흥식과 정완수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길 기대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
어느 날 채유라가 연습실에서 나오다 정남과 우연히 마주쳤다.
“매니저님! 대단하시던데요?”
“그게 무슨...”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
“그렇게 제가 싫으세요?”
“네?”
“그럼 왜 그러셨는데요? 지우 오빠 우리 집 오는 것도 막으시고.”
“네?”
“에이! 그럼 다르게 해석할까요? 설마 나 좋아해요?”
“뭐라는 소린지 난 도무지...”
정남이가 시치미를 뗐다.
채유라가 정남 코밑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럼 나 엿 먹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그녀에게서 나온 거친 말에 정남은 놀랐다.
설마 했지만, 생각보다 아주 당찬 면모에 잠깐 정남은 혼미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려는데 채유라가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다고 지우 오빠가 날 거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예요, 진짜루?”
정남이 채유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차갑게 내뱉었다.
“뭘 오해했나 본데, 착한 지우 괴롭히지 말죠!
고마운 사람은 알아봐야 하지 않나? 아무리 살기 빡빡해도!”
순간 채유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머! 볼매야, 정말!”
“??”
“사실 나 지우 오빠한테 관심 1도 없어요!”
“??”
지우가 조그만 입을 오므리며 동시에 정남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바로 그쪽! 그것도 만땅!”
정남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을 이었다.
“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난 지우를 지켜야 해요. 그리고 꼭 지킬 거예요.”
“그럼, 그쪽은 그쪽이 해야 할 일 하세요. 난 내가 해야 할 일 할 테니까! 딜?”
말을 마친 채유라가 총총히 사라져 갔다.
‘와! 생각보다 훨씬 대담하네! 타고난 건가? 아님 환경 탓?’
정남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남과 헤어진 채유라는 지우에게 즉시 전화했다.
일부러 며칠 동안 채유라는 지우에게 아무 연락을 안 했다.
수줍음 많은 지우가 다시 연락을 안 해와도 채유라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에게선 곡을 받아야겠다는 욕심뿐이라 상관없었다.
<여보세요!>
<나예요.>
<어... 채유라?>
<지우 오빠 나 완전 잊어버렸나 보다!>
콧소리를 내며 거기에 절망 어린 분위기를 더했다.
<어... 그게 아니라...>
<말 안 해도 돼요. 다 아니까.>
<어?>
<매니저 형 말 들은 거죠?>
<어?>
<근데 매니저 말은 음악 관련해서만 들으면 돼요.>
<...>
<나랑 일은 우리끼리. 오케이?>
<우리끼리...>
<나 지금 연습실 방금 나왔는데 어디예요?>
***
역시 정완수 집안은 곳곳에 손발이 뻗어 있었다.
가스공사 이사장이 정완수 큰형과 대학 동기동창이었다.
<형이 꼭 전한다고 했으니까 안심해라!>
정완수 큰형이 가스공사 이사장에게 말을 전한다곤 했다지만, 기남은 안심할 수 없었다.
막역한 친구 사이에도 하기 힘든 부탁을 그저 동기동창이란 인연에 매달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흥식으로부터 온 소식도 별 소득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박흥식이 할 수 있는 일과 가스공사와는 접점이 거의 없으니 그럴만했다.
박흥식과 통화를 마친 뒤 기남은 최대한 그때 상황을 떠올려봤다.
‘제법 추운 날이었고, 주택과 상가가 즐비했던 현장은 마치 폭탄이 떨어진 듯 아수라장이 됐지.
분명 폭발 전에 가스관 밸브에서 가스가 새는 걸 포착해 점검을 했었고, 경보기가 작동됐음에도 가스는 계속 누출이 됐다고 했었어.
가스가 누출되는 걸 감지해야 할 가스 검지기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그렇다면 이걸 점검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정확한 폭발 원인을 아는 이는 지금 시점에선 자기밖에 없으니 기남 입장에선 더 답답했다.
‘대참사가 일어날 걸 알고, 원인까지 알면서 그냥 넘어간다는 건 엄밀히 말해 방임죄에 해당되지. 내 아이들을 위해서도 방임죄를 저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할 수 없이 이번에도 기남은 자신이 이 사고에 직접 가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연주를 위해서는 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무고한 희생자들, 인적 물적 손실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기남은 크게 숨을 쉰 다음 혼잣말을 했다.
“어쩔 수 없어. 연주를 설득하는 수밖에.”
집으로 돌아간 기남은 연주 눈치를 살폈다.
다른 날보다 일찍 들어온 기남을 반기며 연주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게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많이 비쌀 텐데.”
연주가 좋아하는 군밤을 받으며 외쳤다.
“...”
연주가 어머니를 부르려고 하자 기남이 그녈 막았다.
“얼마 되지 않는데 당신 먹어. 어머니는 내가 다음에 사다 드릴 테니까.”
“어? 아이 그래도 어떻게 나만 먹어?”
굳이 군밤을 들고 방을 나서려는 연주를 막아서며 기남이 운을 뗐다.
“연주야! 나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그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기남을 보면서 연주의 안색이 변해갔다.
군밤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연주가 무심히 말했다.
“또구나? 그렇지?”
“어?”
“또 정의의 사도 역할 하려는 거 아니야?”
“어... 그런데 이번엔 정말 위험한 거 아니야.”
연주가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뭔데? 한 번 소상히 말해 봐, 우선!”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