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골로 귀농한 이유

"그대는 물 흐르는 쪽으로 살고 있는지..."

by 배동분 소피아

살다 보면 별일도 다 있다.

남편의 귀농 얘기가 그 경우이다.


지금이야 귀농이 흔해 빠졌지만 남편이 귀농 이야기를 입 밖으로 흘리던 시절은

명퇴당했거나 사회 부적응자 거나 하는 시선으로 보는 그런 시절이었다.

1998년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귀농하고 싶은데. . . ."


물론 난 흘려 넘겼고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조금의 동요도 필요 없는 이야기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남편은 '귀농'이라는 단어를 어디 말 붙일 수 있는 곳이라면 다 붙이며 내 머리에 박으려 들었다.



하루는 마주 앉아 물었다.

왜 그런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단다.

난 화가 나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춘천에 작은 땅이 있었다.

그건 늙으면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말고 우리 둘이 텃밭 일구고 등 긁어주며 살기 위해 사놓은 땅이다.


회사를 다니며 주말마다 춘천 땅에 농사를 지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귀농교육을 받고 싶다고 해서 그때 내가 그건 그러라고 했다.

주말에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우리는 내 안의 창을 얼마나 들여다 보며 살고 있는지.)


어차피 우리의 연식이 고봉으로 쌓이면 자식들 앞에서 알짱거리며 살 필요 없이 우리끼리 공기 좋은 곳에서 채마밭이나 일구며 둘이서도 잘 놀 계획으로 춘천에 땅을 산 것이니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것이 화근이 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런데 회사에 멀쩡히 잘 다니던 잘 남편이, 이렇게 새파란 사람이 간다는 거였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지 말라며 흘려 넘겼다.


두 번째로 귀농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았을 땐, 괜히 평지풍파 일으키지 말고 그 말을 주워 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어느 날 편지가 왔다.

남편이 보낸...


거기에는 귀농 이유가 알사탕 매달려 있듯 줄줄이 엮여 있었다.

연애할 때도 못 받아본 편지를 이렇게 받아보다니...


첫째, 남을 밟고 내가 올라가야 하는 사회, 이기적인 생각과 잔머리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사회가 싫었고 정년퇴직 때까지 그렇게 산다는 게 서글프고 허무하더란다.

그래서 속으로 떠올렸다.

‘원래 인생이 서글픈 거야, 다들 넥타이 졸라매고 허무하게 사는 거야....’


그래서 나머지 삶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의 페달을 내가 조절하며 밟고 사는 삶을 살고 싶단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멋있는 말을 그에게서 들은 적이 없는데 사태가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었다.


말은 좋지...

그러나 현실이 그것을 바쳐주지 못해서 많은 이들이 결단을 못 내리는 것이지 않은가.

둘째, 남자로 태어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고 싶단다.


그저 시계 추처럼 삭막한 공기를 끌어안고 하루를 시작해서, 찌든 도시의 찌꺼기를 집까지 지고 와야 하는 도시생활에 염증이 난단다.

더 높은 직위, 더 큰 아파트, 더 좋은 차 가지면 가질수록 빈 가슴에 바람만 이는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봄 여름 가을 겨울할 것 없이 놀이터는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셋째, 아이들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위에서 계획된 스케줄대로 이 학원, 저 학원 기웃거리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단다.

자연에서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며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땅과 함께 호흡하며 자라게 하고 싶단다.

그래서 귀농은 반대를 해도 하긴 하는데 되도록이면 동의를 얻고 싶단다.


다시 두 번째로 마주 앉았다.

"당신만 일이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내 일이 있고, 내 일 또한 소중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고 싶다고 하면 내 일 역시 놓고 싶지 않은 일이다"
라며 이번에는 내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것들을 풀어냈다.



둘째인 어린 딸의 육아문제로 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다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 난 남들이 가지 않는 길, 남들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인 귀농에 대한 고민으로 여러 날을 새웠다.


사실 겉으로는 남편에게 기 세게 반대를 했지만 그건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지금까지 일에 관한 한 가장으로서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귀농을 해도 실망시키지 않을 거란 믿음이 크게 작용했다.


또 내가 존경하는 성 프란체스코 성인이나 법정스님이 강조하시는 무소유적인 삶에 대해선 늘 가슴을 열고 있던 터라 남편이 말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끌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문제는 그이 생각보다 내가 더 그렇게 자연에서 책과 여행으로 키우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늘 바쁜 아빠의 맨 얼굴 보는데 2박 3일 걸리는(거의 매일 회식이다 뭐다 하여 술 취해 들어오면 아이들은 자고...) 생활,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아빠의 관계는 서먹서먹하고 이웃집 아저씨같은 온도였으니. . .

안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의 온도 등이 더없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겨울이면 화롯가에 모여 온 가족이 책을 읽었다)


삶에 있어서 '양 손의 떡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도시에서 돈도 잘 벌고, 풍족하게 살면서 자연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와 많은 대화를 하고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지....


그렇다면 난 어느 쪽의 떡을 쥘 것인가??

자연에서 아이를 키우고, 삶의 방식을 바꿔 보자는 떡을 쥐기로 결정했다.

결국 1999년 12월 23일 귀농을 허락했다.

귀농을 허락하니 남편이 당황했다.


한 몇 년 구슬려야 넘어갈까 하는 생각으로 장기전을 펼쳤는데 의외로 단박에 가자고 하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귀농을 허락했으니 이제 돈을 더 아껴 쓰고 술도 덜 마시고 해서 조금의 돈을 모아가면 가족들이 덜 고생할 테니 딱 3년만 회사를 그대로 다니다가 사표를 내겠단다.


내가 단호히 말했다.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큰데 3년 후면 아이들이 너무 연로해져서 안된다고...



한 살이라도 더 어려서 자연으로 데리고 가야 스펀지에 물 스미듯 자연의 물이 스며들 것이기 때문에 귀농을 하려면 지금 하던지, 아니면 때려치우던지 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용감’이 귀농까지 결정하게 했다.


내가 귀농을 허락하고 사표를 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귀농 결정하고 나니 바쁜 사람은 나!


부동산 사무실에 아파트 내놓고, 춘천 땅 내놓고, 귀농정보 알기 위해 이 책, 저 책 읽고, 아이들의 문화충격을 줄여주기 위해 초등학교 2년생인 아들과 유치원생인 딸아이와 많은 이야기와 이해를 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현대자동차 소장시절의 남편)
(귀농 직후 박씨 일가의 모습)


이제 집도 팔리고, 땅도 팔리고, 귀농지도 구입했는데 그때까지도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사표를 내면 반려되고, 내면 반려되고...


결국 팔린 아파트를 비워줘야 하는 날이 되어 나와 아이들만 먼저 산골로 옮겨 앉았고, '나를 따르라'로 침 튀겨가며 외치던 귀농 주동자인 남편은 정작 서울에 남아야 했다.


이제 주소지도 울진으로 바뀌고 아이들도 울진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는 것을 본부장님께 말씀드리고서야 사표가 수리되었다.


아이들과 내가 먼저 귀농하고 한참 후에야 현대자동차 소장의 자리를 참새 깃털 털듯 툭툭 털고 남편은 산골에 합류했다.


"그대는 물 흐르는 쪽으로 살고 있는지..."



산골 다락방에서 배 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