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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un 02. 2021

나는 신데렐라를 꿈꾸던 신데룰라입니다.

『신데룰라』- 엘렌 잭슨 글, 케빈 오말리 그림

한 마을에 신데렐라와 신데룰라가 살고 있었습니다. 둘 다 맘씨 고약한 새엄마와 엄마들과 살고 있었어요

하지만 둘의 생활은 정 반대였답니다. 힘든 집안일이 다 끝나면 신데렐라는 잿더미 속에 앉아 몸을 녹이며 이런저런 걱정을 했지만, 신데룰라는 잿더미에 앉아있을 시간에 돈을 받고 이웃집의 앵무새 새장도 청소해주고,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나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신데룰라다. 부모님은 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키웠다고 했는데, 온실 속에 자라 세상 물정을 몰랐고 밖으로 나와보니 온실 속에 잡초 같은 내 모습에 실망했다. 온실 밖의 세상에는 나보다 정성 들여 키운 화초보다 더 멋진 사람들이 넘쳐 났다. 대학교를 입학할 때도 회사를 취직할 때도 늘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낮은 나의 존재감에 좌절했다. 신데렐라가 잿더미에 앉아 집안일하느라 지친 몸을 녹이며 걱정만 하고 있던 것처럼, 나는 늘 내 상황에 만족하지 못했고 부끄러워했다.


대학 시절, 편입을 하려고 했으나 학교생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계획을 접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며 교수님과 조교들과 돈독하게 지내다 보니 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았다. 현실감 없던 지방대학생이었던 나는 토익 준비는 했지만 성적은 나오지 않았고, 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모두 취업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취업하기 위한 스펙은 내겐 없다는 걸.

그때 당시에는 토익점수는 기본이었고, 해외 어학연수나 배낭여행 경험은 필수였으며, 인턴경험까지 두루두루 갖춘 사람들이 넘쳐 났다. 머리로는 대기업은 내가 갈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내가 만만히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나마 조교님과의 인맥으로 학교에 들어오는 취업정보가 있으면 우선으로 내게 연락을 주셨다. 하지만 학교가 지방이다 보니 회사들도 대부분 지방에 위치해있었는데 부모님은 내가 따로 독립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에 대부분의 제안을 포기하는 상황이었다.

우연히 서울 쪽에 선배가 운영하는 여행사에 자리가 났고, 면접을 봤고, 출근을 했다.

부모님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경험을 쌓으라고 하셨는데, 지금 돌아보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처럼 그 선택이 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첫 회사는 작은 규모의 여행사였다. 그래도 전문 분야를 취급하는 곳이어서 일은 끊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일을 했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욕심이 생겼다. 내가 꿈꾸던 직장인의 모습은  건물 입구에 회전문이 돌아가는 큰 빌딩으로 정장에 하이힐을 신었으며 사원증을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남들은 내가 부모님의 사업장에서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부모님의 그늘에서 최대한 벗어나고 싶던 나는 일단 눈앞에 온 기회를 잡았는데, 막상 취직하고 나니 부모님의 사업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작은 규모의 회사였다.  그래서 이직을 시도했고, 원하는 데로 회전문이 돌아가는 빌딩으로 사원증을 메고 출근하는 곳이었으나 과도한 업무로 새벽이슬을 맞으며 출근을 하고 별빛을 보며 밤에 퇴근하는 일상으로 바뀌었다. 겉은 화려했지만 나는 점점 좀비처럼 변해갔다.

신데렐라는 꿈에 그리던 멋진 왕자님을 만나 결혼에 골인했고, 궁궐에서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현실은 너무 따분하고 지루했다. 신데룰라도 자기와 딱 맞는 왕자님을 만나 결혼했고, 소소한 것들 속에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책은 묻는다. 누가 정말로 행복하냐고?


어른이 되면 나도 신데렐라처럼 멋진 왕자님을 만나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 꺼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결혼에 대한 환상으로 물들어 나는 결혼을 준비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꿈에 젖어있었다.

그 꿈이 깨어졌던 것은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집에 돌아와 자고 일어난 첫날 아침이었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아침밥을 챙겨 먹는 것부터 고비였다. 물론 반찬은 양쪽 집에서 받아와서 밥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늘 챙겨주는 밥만 먹다가 일어나서 밥을 차려서 먹으려니 서툴고 어색했다.

그나마 남편은 회사가 차로 10분 거리라 더 늦게까지 자도 되는데 먼저 출근하는 내가 차려주는 밥을 같이 먹겠다고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어야 했다. 퇴근 후에도 나보다 먼저 퇴근하는 신랑은 저녁을 같이 먹으려고 나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나를 회사까지 데리러 왔고, 퇴근길에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일이 늘어갔다. 늘 챙겨주는 것을 받는 것에 익숙했던 두 남녀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 당황했고, 남녀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확실히 있던 우리 부부는 뭔가 바뀐 듯한 위치에 미안해하고 어색해했다.

한 달이 지나 아침은 각자 해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후 나는 빈속으로 출근을 하고, 남편은 잠을 더자고 혼자 챙겨 먹고 나갔다. 저녁은 여전히 함께 식당에서 먹었으니 집밥을 사랑하는 우리 부부는 점점 밖에 음식에 질려갔다. 나는 결혼 후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졌는데, 회사일로 스트레스가 많은 상태에서 임신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몸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운 좋게 임신이 되었는데 유산을 했고, 그때 받은 충격으로 몇 달을 못 버티고 나는 퇴사를 했다.

남편과 내가 생각하던 저녁 식사의 모습은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 함께 저녁을 먹는 모습이었다. 결혼 후 1년이 지나서야 그 모습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퇴사 후 제일 먼저 한일은 백화점 문화센터로 요리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이었다.

전업주부의 로망이랄까? 그곳에서 배운 요리로 손님들을 불러 식사대접을 하고, 매일 남편과 먹을 음식을 하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3개월쯤 쉬었을 때, 슬슬 지금의 생활이 지겹게 느껴졌다.  임신도 마음대로 안되고 살도 결혼 전보다 10킬로 넘게 쪄서 다이어트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모아돈 돈도 슬슬 떨어져 가고 새롭게 일을 해볼까 하는 찰나에 첫째가 생겼다.  한 번의 실패 후에 생긴 아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차로 한 시간 이상 거리는 외출을 하지 않았고, 태교를 한다며 집에서 아기용품을 바느질로 만들고 있었다.  결혼 후 남편 따라 살게 된 동네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오롯이 집에서만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집 안보다는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20대에는 자동차 동호회에 가입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쫓아다녔고, 여행사에 오래도록 몸담을 수 있었던 이유도 주기적으로 여행이든 출장이든 해외에 나갈 수 있어서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줌바라고 할 만큼 나는 흥이 많고 그것을 분출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결혼하면 돈은 남편이 벌고, 애를 돌보고 가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 여자의 일이라고 당연하게 생각을 하니, 어느덧 나는 남편과 아이 중심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답답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고 있지만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해서 계속 망설이게 되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은 현실을 말해주지 않는 걸까?

직장생활도 결혼도 육아도 있는 그대로 미리 말해줬다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을 텐데.

나보다 먼저 경험한 선배들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음에 화가 난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뒤늦게 이런 경험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이렇다고 말을 해주지도 못한다.

간섭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이미 큰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나도 그랬겠지. 그래서 일단 부딪혀보고 느껴라 하는 심정으로 그냥 이야기만 들어준 것이 아닐까?

너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뜻과 그것이 네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이 뒤섞여 그저 듣고만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농담처럼 '내 인생은 시트콤 같아'라고 말했던 이유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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