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인가 잔인한 즐거움인가

떠나갈 필요 없던 이들이여

by 진정

사람들은 저마다 정의의 깃발을 휘날리지만, 정작 그 깃발 아래에서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비난을 정의라 부르고, 손가락질을 양심이라 착각한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설 때, 그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죄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단죄할 기회를 즐기려는 듯한 표정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스스로를 심판자로 착각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타인의 실수를 포착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잘못이란 원래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벌을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반드시 비난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작은 실수 하나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어떤 이는 그보다 더한 죄를 짓고도 태연히 살아간다. 죄는 본질이 아니라, 그 죄를 바라보는 눈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타인을 평가하는 순간, 자신이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흠 없는 삶을 살아온 적이 없으며, 다만 우리에게 향하는 손가락이 향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한 번도 도덕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단지, 아직 그 실수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군대에선 이와 관련해 유명한 말이 있다. "안 걸리면 안 한 거다." 비난의 손가락을 드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를 숨기고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돌리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죄를 가늠할 수 없는 이에게 돌을 던질 용기는 없다. 돌을 든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신념이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이 진정한 정의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만든 편견에 불과한 것일까. 누군가를 비난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언제나 옳을까? 타인의 실수를 단죄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기 쉽다. 타인의 실수를 보고 위안을 얻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위로는 오래가지 않는다. "살은 베이면 아물려하고, 부러지면 붙으려 하지만, 마음은 상처를 입고도 아무런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하며 잠시나마 우월감을 느끼지만, 결국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우리를 더욱 메마르게 만든다.

비교는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갉아먹게 만든다. 타인의 빛이 눈부시거든 축하하면 된다. 그리고 나의 그림자가 길어졌다면, 먼저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애초부터 타인의 그림자에 매달리는 자에게는 성장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타인의 실패를 보며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우리가 정말로 나아지고 싶다면, 비교를 멈추고 자기 자신을 키워야 한다.

비난의 손가락을 드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손가락이 언젠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덕적 우월감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심판자라고 착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 역시 심판대에 서게 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단죄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심판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손가락을 들고 있다. 그 손이 나를 향할 날이 올지, 언제 그 손을 내릴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더 이상 그 손을 들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그 손이 나를 향할 때, 나는 부디 그 손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진정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신념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손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