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가장 필요한 복지는 어쩌면 필연적인 복지는 노인을 향한다고.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취약계층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누구에게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모두 노화를 피할 수 없다.
다른 계층을 돕고 지원하려는 마음은 선하지만, 때로 그 과정에서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불거지기도 한다. 그러나 노인의 삶은 예외다. 나이 듦은 선택도, 상황도, 가능성도 아닌 필연이다. 이 진실은 누구도 비껴가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덮치는 죽음을.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린 이상하게도 나이 듦에 잔인하다.
지하철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를 보면 '애니까 그럴 수 있지'라며 관대해진다. 애틋한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같은 소음이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다짐을 한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 모두 늙을 것을 알면서도, 늙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 결심은 한낱 자기기만일 뿐이다. 공경(恭敬)은 명예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하지만 당신이 늙었을 때, 한 번도 젊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감히 장담하지 못한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는 노인들을 보며 "왜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까?" 하고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귀가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사람들 틈에서 길을 더디게 걷는 이유도 같다.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속도가 늦어진 것도, 결국은 늙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나이 들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노인은 젊은 층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방구석 한켠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치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살아야 할까. 느린 자살을 하듯, 세상에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숨죽여 살아야 할까.
아쉽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물론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불편함과, 흔히 ‘틀딱’이라 조롱받는 몰상식한 행동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늙어서 몰상식해지는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몰상식했던 사람이 그대로 나이 들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틀딱'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건 기력 없는 노인의 몰상식함이 아니라, 생각 없이 살아온 세월의 결과다. 그냥 그랬던 젊은 사람이 늙었을 뿐이다.
나는 종종 두려워진다.
어느 날, 정신 나간 청년들이 학부모가 되고, 그런 사람들과 같은 시대에 내가 학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기력이 쇠한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자신은 절대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젊은 사람들. 그러나 그들 중 몇은, 지금의 몰상식을 10년, 20년, 어쩌면 30년 넘게 품고 살아가 결국 누군가의 ‘틀딱’이 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도 늙어간다.
올해는 스물다섯 살인 내가, 어제의 따스한 오후에 바깥 풍경을 보며 스물하나였던 나를 그리워했다. 불씨가 더 밝고 크게 타올랐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세월은 그렇게 사소한 틈으로 들어와, 나도 모르게 젊은 날을 조금씩 빼앗아 간다.
아마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도 똑같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누군가는 내 느린 걸음을 보며 한숨을 쉬겠지.
그러니 말해두고 싶다.
당신이 시간이 흘러도 몸에 아무 변화가 없는 로봇이라면, 나에게 돌을 던져라.
하지만 기억하라. 커다란 바위 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모래가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늙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