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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스트 Sep 16. 2017

고된 육체는 고된 마음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그렸다.

자취란,

자취(自炊) - 스스로 自, 불 땔 炊     [명사]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생활함.

의 뜻이다. 

직접 해보지 않는다면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없다. 

결국에는 경제적인 문제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너무 어린나이에 알아버렸다.


학생이었던 우리 형제를 비롯하여 누군가의 도움없이 타향살이를 하는 자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돈'으로 귀결된다. '돈'이 있다면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끼니를 연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고된 노동 또한 필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시로 발생하는 원룸 방화 살인사건이나 고독사, 송파 세 모녀와 부천 세 자매들의 자살 소식을 들으면서 안따까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서울이란 곳이 몸 뉘울 곳을 찾아 생활하는 데만 10~30여만원이 매달 필요하게 되는데 가장 저렴한 방이라는게 그렇다. 방화에 취약하며 방음, 방진등에 피해를 호소할 수도 없다. 모두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google>


나 역시도 돈이 있었다면 좋은 원룸에서 보일러를 가동하고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상해버린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때 당시 자취생활을 하면서 들어간 비용을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월 지출 금액(3형제 생활 기준)

방값 : 11만원

식비 : 10만원

인터넷 요금 : 2만 5천원

통신요금 : 10만원

기타소모품 : 5만원


근 40여만원이 고정지출로 사용이 되는데 여기에는 학업에 필요한 책값, 기타 부식비는 제외된다.

아무리 아끼고 산다고 해도 3형제가 살아가려면 최소 한달에 60여만원이 필요하게 된다. 당시 내 알바수입은 40~80만원 사이였으니 말 그대로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다. 가끔 급하면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만 하는데 부모님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기란 참 쉽지 않다. 간혹 아픈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대책이 서질 않는다.

(다행히 우리 형제는 태어날때부터 금강불괴의 몸을 타고났는지 잘 아프지는 않았다.) 


<자취당시 우리 삼형제들의 싸이월드에서의 대화>


돈이 없으면 몸이 힘들어진다. 위의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늘 일을 해야 한다. 나도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졸업전시작품도 준비해야 하며 취업준비도 해야 하지만 그 흔한 토익학원 한번 다녀본적이 없었다.(졸업하고 다녔다) 내 동생도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면서 학원은 커녕 문제집도 제대로 사서 보질 못했다. 이번 글에서는 돈을 아끼기 위해 또는 돈을 벌기위해 우리 형제가 어떤 식으로 몸으로 때웠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보다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신 분들도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이 우리만 고생했다는 의미로 비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몸이 고될수록 마음이 피폐해질 수 있으니 이를 경계코자 하는 의미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1. 다리

돈이 없으면 어딘가를 이동하고자 할 때 흔한 대중교통조차 이용하지 못한다. 우리는 다행히 자전거를 이용하게 되었지만 자전거를 이용하지 못하는 장소이거나 자전거가 없을 때는 오직 다리만을 이동수단으로 삼게 된다. 걸어서 한시간 걸리는 거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택시라는 교통수단은 맨하튼 같은 대도시의 부호들이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햇다. 시내버스가 당시 900원 정도 선이였으나 2시간 이내의 거리는 무조건 걸어다녔다. 날씨가 춥고 덥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짐이 많아도 마찬가지다. 우리 형제의 다리는 '수라의 각'이였다.


2. 팔

집안일을 하면서 팔을 안쓰는 사람은 TV속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다. 요리부터 시작해서 설겆이. 청소, 빨래로 이어지는 중노동이 매일 우리를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자취방에 세탁기는 탈수가 안되었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짜서 널게 되고 진공청소기 이딴 것은 국민소득 4만불 이상 되는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혼자사는 자취라고 해도 청소는 자주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3. 허리

학생때 돈버는 일이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거의 몸을 쓰는 일이 전부이다. 나는 주로 학원강의를 했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지만 내 동생들은 머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허리를 자주 써야만 했다. 내가 졸업을 앞두고 있을때 학원강의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수입이 없다보니 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거의 전업으로 하다시피 했다. 둘째는 일단 토목현장의 잡부로 일을 했다. 한달정도 집을 떠나 현장에서 지내고 돌아왔었고 이 후에는 둘째와 막내 둘이서 학교 인근의 연탄불 고기집에서 알바를 했는데 이 일이 영 힘든게 아니다. 워낙 손님이 많기도 했었고 고된 일때문에 다른 알바생들은 며칠을 못버티고 그만두었다. 


언젠가는 하루 20시간을 매일같이 고기집과 다른 알바자리를 돌면서 일하기도 했다. 그 때 막내는 둘째한테 그러다 죽는다고 말을 하기도 했었다. 아마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둘째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허리를 굽히지 못했다. 며칠뒤 침도 맞아보고 했지만 소용이 없어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였다. 매일매일 고통으로 신음하는 둘째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었고 그 때 난 소원을 빌었다. 


"하늘이여, 땅이여, 천지신명이시여 내 영혼을 당신들께 바칠테니 내 동생의 허리를 고쳐주십시요"


뭐 기도가 닿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수술한번 안받고 동생은 거의 완치되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뒤,

막내동생도 할인매장에서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쳤다. 역시 디스크였다. 어느날 집에가니 막내동생이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방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병원에 가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난 다시 한번 소원을 빌었다.


"하늘이여, 땅이여, 천지신명이시여 혹시나 저번에 바친 내 영혼의 값어치가 조금이라도 올랐다면 저 놈도 좀 고쳐주소서... 악마한테 헐값에 넘기셔도 좋습니다."


역시 막내동생도 수술없이 완치되었다.(요즘 가끔 심부름을 시키면 냅따 허리부터 잡는 나쁜 버릇이 이때부터 생겼다.)


<당시 막내동생의 디스크 판정 CT와 동생의 글>


4. 마음

몸이 고된것이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이 피폐해진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고 돈을 벌지 못하면 이런생활을 더 많이 더 오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몸을 지배해야할 마음이 몸의 고통으로부터 지배받게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발생한다. 시간이 갈수록 몸의 고됨은 습관이 되어 적응이 될 수 있지만 마음안에 부정적인 마음들은 점점 커지기만 한다. 내가 자취를 하면서 배운 것은 이것이였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우리에게 닥쳐도 긍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늘 원하는 꿈을 끊임없이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꿈을 머릿속으로 계속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 꿈이 현실로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힘들었던 생활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내성을 길러주어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했을때,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된다. 물론 그 힘든 생활은 끝없는 피해의식을 주기도 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다가올 풍요를 그리며 자취생활을 버텨나갔다.

내가 이 시리즈를 '자취의 슬픔'이 아닌 '자취의 추억'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지금은 삼형제 모두가 집이 있고 먹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 즉시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 어려우면 아무런 사심없이 도와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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