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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30. 2022

이렇게 사는 즐거움

Part2. 프로 역마러가 롱런하는 법

 15년이 넘는 직장생활에서 터득한 첫 번째 진리는 '나서면 손해'라는 것이다. 

 잘난 척을 하는건 아니지만 누가 모르는 게 있으면 알려주고 싶은 오지랖이 발동한다. 학원 강사를 한 직업병이 남아 있는 건지 원래 오지랖이 넓은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지 싶다. 문제는 아무리 호의로 인한 행동이라도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직장에서 나서면 무조건(!) 손해다. 하도 면접과 이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입사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어도 연차가 제법 된 직원처럼 노련해 보이는 스킬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오래전부터 다닌 내 회사인 양 개선할 점이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대표에게 서스럼 없이 의견을 말했다. 


 궁금한 건 못 참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모르는 걸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점을 좋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텃세 좀 부리는 바로 윗 상사나 꼰대인걸 감추려는 대표에게 잘못 걸리면 찍힌다. 


 "원래 그렇게 예민해요?"

 "뭘 그리 따져요? 깐깐하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한국 문화에서 나의 호승심은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여자' 취급을 받기 일쑤다. 괜히 나서서 일을 만든다며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맙시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과장님이 질문하는 바람에 회의가 더 길어졌잖아요?!"


 나라고 눈치가 없어서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다. 다만 이직을 했으니 현재 회사에서 오래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다. 조금만 개선하면 될 일을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일을 떠맡는 직장 특유의 문화에 다들 침묵이 미덕인 사회가 되어 버렸다. 


 대표도 처음에는 들어주는 척하다가 회사 매출에만 급급할 뿐, 직원 복지나 인사 시스템 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게 들통나면 저렇게 모르쇠로 일관해 버렸다. 나라고 뭐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진실이나 까발리는 '예민한 여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회사도 아니고 뭘 그렇게 개척자처럼 나서나 싶다가도 성격상 아닌 걸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몇 번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실망해서 이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스타트업은 패배감보다 희망에 차 있을 때라서 대표가 이상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나보다 어린 대표와 근 일 년 만에 면접을 볼 기회가 있었다. 면접이 아니라 흡사 세미나인 양 임원진과 스타트업의 문제와 애로사항 등을 활발하게 토론(?)했다. 


 3대 1의 면접 형식으로 한참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임원이 이런 질문을 했다. 


 "백 소피 씨는 왜 취업을 하려고 하죠? 직장을 다닐 게 아니라 창업을 할 분 같은데요?"


 호의적인 말투였기에 "그만큼 귀하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뜻인 줄로만 알았다. 최종적으로 합격이 될 듯하다가 안 되었을 때 그 임원의 말이 생각났다. 그들도 제법 고심을 했는지 예정보다 하루 늦게 불합격 통보를 했다. 합격 여부를 떠나서 요즘 취업 시장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이유를 물어봤다.


 장문의 메시지가 왔는데 한마디로 "직장에 오래 있을 사람 같지가 않다"라는 것과 "만약 그럴 경우 리스크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라는 게 그들의 이유였다. 통화를 하거나 차라리 추가 면접을 봤으면 반박할 만한 101가지 이유를 댔을 텐데 아쉬웠다.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잘 안다. 회사는 '일 잘하는 똑똑한 직원' 보다 '시킨 일 잘하는 오래갈 직원'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스타트업이면 회사에 오래 있으면서 같이 커갈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사장 같은 직원이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에 성장하려면 그런 리스크를 감안하고서라도 일당백으로 해낼 사람을 뽑을 수도 있다. 아마 그들의 스타일이 그런 듯하니 결론적으로 나랑 맞지 않는 셈이다. 


 한편으론 잘 됐다 싶었다. 이제는 감추려고 해도 티가 나는구나 싶었다. 직장을 다니고 싶은 척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구나. 더 이상 나를 속이지 말자. 




 불안하더라도 프리랜서의 삶을 살도록, 내가 원했으나 차마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마치 운명처럼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한 가지 길만 눈앞에 보이니 피할 수 없게 됐다. 

 

 '프로 역마러'의 삶은 계속되지만 직장에서는 끝났다. 평균보다 좀 더 예민하고, 불안을 감지해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무던한 척하고, 안정적인 삶을 꿈꿨지만 그런 삶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토록 원했던 일이니 기쁘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그래, 못하는 것을 억지로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자. 현실적으로 고정 수입이 없어졌으니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다. 생존을 위해 꼭 해야 할 소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후순위로 미뤘다. 소비를 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인맥과 이것저것 기웃거리던 인문학 수업도 정리했다.


 공부에 필요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중고로 구입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되 꼭 필요한 책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직장에 가지 않으니 옷이나 화장품 등 겉치레 비용이 들지 않고, 아침마다 뭘 입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 옷가지를 가장 많이 줄였다. 건조기를 들여놓은 후로 자주 입는 옷 한 두벌만 있으면 충분하다. 


 생활 자체를 단순화해서 내가 가장 신경 쓰는 일은 딱 두 가지뿐이다. 정신분석학 전공 공부와 글쓰기. 관심 가는 인문학 수업은 많지만 지금은 잠시 접고, 스스로 실력을 쌓을 은둔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 향을 피우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모닝 페이지를 쓴다. 모닝페이지 쓰기는 몇 년 전에 혼자 시도하다가 최근에 수업을 듣고 함께 인증하며 다시 쓰고 있다. 혼자 썼을 때는 손으로 쓰지 않고 노트북에 타이핑했다. 쓰는 시간도 들쭉날쭉, 쓰는 날도 들쭉날쭉했다. 그렇게 100개를 쓴 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았다. 거의 같은 얘기만 반복해서 쓰는 걸 보고 고민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주 가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모닝 페이지 쓰기' 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정말 반가웠다. 모닝페이지의 창시자 줄리아 카메론은 책 <아티스트 웨이>에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게 워크북 형식으로 안내한다. 처음에는 혼자 하기보다 소규모 그룹이라도 만들어서 함께 하길 추천한다. 


 모닝페이지 수업을 하는 선생님은 실제로 줄리아 카메론이 하는 런던 워크숍까지 참여하고 오랜 시간 동안 모닝페이지를 써 온 분이다. 수업이 끝나도 인증을 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어서 중단하다가도 다시하게 된다.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오랜만에 손글씨를 썼다. 맨날 타이핑만 하다가 손글씨를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 손목이 아팠다. 


 모닝페이지는 정해진 분량이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 써야 한다. 예전에 혼자 썼을 때는 분량도 쓰고 싶은 만큼만 써서 일정하지가 않았다. 딱 정해진 분량만큼 쓰는 것도 쉽지가 않다. A4 용지 기준 3장을 쓰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린다. 중간에 쓰다가 딴짓을 하거나 잡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만 쓰고 싶기도 하고 온갖 상념이 다 든다. 


 모닝페이지를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타이머를 켜 놓고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했다. 줄리아 카메론은 "멈추지 말고 쓰라"고 한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멈추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의식의 흐름대로 쓰라는 얘기다. 생각이 많다 보니 이게 잘 안 됐다. 완전한 문장을 쓰려는 자기 검열에 빠져 생각을 먼저 하고 그다음 쓰는 행동을 하니 자꾸 멈추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멈추지 않고 쓰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 


 모닝페이지는 일기와 다르다. 어릴 때 일기장 검사를 받던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에 마치 일기처럼 지난 일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다짐하는 이딴 교훈적인 내용을 쓸 필요가 없다. 나 말고 세상 그 누구도 보여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내밀한 속마음을 날 것 그대로 쓰면 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의식까지 깊이 들어가 쓰려면 예열 작업이 필요하다. 보통 2장이 넘어가고, 마지막 반 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 진짜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깨달음이 터져 나온다. 


 처음 쓰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A를 써야지 하고 시작했다가 어느새 Z를 쓰거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알파를 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앞 뒤 문장이 안 맞고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모닝페이지는 글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3페이지라는 분량이 얼마나 절묘한지 뭔가를 딱 깨닫는 순간에 펜을 놓게 되어 아쉬운 적도 많다. 그럴 때 줄리아 카메론은 단호하게 거기까지만 써야 한다고 말한다. 거의 휘갈기듯 괴발개발 같은 글씨로 글을 쓰지만 개의치 않는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속기로 써도 늦을 것 같다. 생각과 쓰기가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모닝 페이지는 매번 색다른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글쓰기가 아니라 명상과 같은 자기 성찰에 가까운 행위이다. 


 모닝페이지를 쓰면 글 쓰는 훈련이 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분량을 쓰는 것만으로도 그 안의 내용은 둘째치고 습관 자체가 잡힌다. 글 쓰는 실력은 훈련이 필요하다. 글 쓰는 루틴을 잡는데 모닝페이지 만한 도구가 없다. 


 모닝페이지가 익숙하지 않을 때는 다 쓰고 나면 지쳐서 다른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이걸로 매일 글쓰기를 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글 쓸 시간도 모자란데 모닝페이지를 쓰려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모닝페이지에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소재와 시놉시스를 쓴다. 소재가 막히거나 스케치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거다. 그런 뒤에 초고를 쓰면 훨씬 쓰기가 수월하다.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글쓰기의 영감을 얻을 때도 많다. 모닝페이지의 모토가 '내 안에 잠든 창조성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줄리아 카메론도 모닝페이지를 통해 잃어버린 창조성을 되찾고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모닝페이지 창시자로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창조성을 찾는 작업은 생각보다 지루하다. '프로 역마러'는 지루한 걸 못 견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너머에 얻게 될 진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그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 중이다. 


 은둔의 시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만 집중할 수 있도록 삶 자체를 단순화했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남는 에너지를 중요한 일에만 쏟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그리 의지가 강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최대한 멀리한다. 핸드폰은 직장도, 인간 관계도 정리했으니 급하게 연락 올 일이 없으니 무음으로 해 놓고 최대한 멀리 분리시킨다. 


 글쓰기의 원천이 되는 전공 공부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번 학기에 논문을 써야 해서 사실상 공부가 최우선 과제이다. 논문을 처음 써봐서 너무 막막하고,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그럭저럭 첫 발을 내딛고 있다. 논문은 내가 쓰는 거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니 교수든 조력자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잘하기보다 완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누구에게나 은둔의 시기가 필요하다. 대나무는 5년 가까이 땅 속에만 있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나온다. 지금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아주 조금씩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사는 삶이 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아마 큰 틀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니까. 다행스럽게도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몰라서 이 길, 저 길 왔다 갔다 우왕좌왕하던 시기는 지난 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단조로운 지금의 삶이 오히려 더 다채롭다. 매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렇게 기대되는 삶은 처음이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른다. 행복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신기루 같은 먼 행복을 바라기보다 매일매일 조금씩 덜 불행해지는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프로 역마러'라서, 이렇게 사는 즐거움을 알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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