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귀한 시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많은 것들을 해내고 있는 박준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이다.
박준 시인은 1983년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수료했으며,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문학을 잘 배우면 다른 이에게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알았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시집은 10년 후에 종합 베스트 설러 1위에 올랐고 50쇄 17만 부가 판매되었다. 대단한 성과다. 박준 시인의 돌풍은 문학계를 놀라게 했고 문단계의 아이돌로 꼽힌다.
박준은 평소 음악방송의 심야 DJ로,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시 쓰기를 하루 30분 할애한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이라고 소개하기가 어색하다며 자신을 시 쓰기 하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는 하루 생활중 시의 소재나 찾거나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자신의 눈빛이 달라지고 예민해진다고 말했다. 박준 시인은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 퀴즈>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했으며 <이동진의 빨간 우체통>에도 출연했다. 그는 문학 강의도 잘하고 미소와 눈빛이 무척 순수해 보인다. 박준 시인은 문단계의 보배이자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천재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시 시리즈 전문 출판사로 표지 디자인을 최대한 단순화했다. 단색이 특징이며 작가별 시집을 다양한 칼라로 시선을 끈다. 박준 시인의 시집은 밤색 빛의 표지에 시집 이름은 시의 제목에서 정했다. 시집 안쪽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나도 당신처럼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시집은 4부로 구성되었으며 총 62편이 실려 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꾀병 / 박준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일 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지금은 우리가 / 박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환절기 / 박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 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 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눈을 감고 / 박준
눈을 감고 앓다 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 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 넣고 있었습니다
박준 /세상 끝 등대 1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시집 발문은 시인 허수경 선배에게 부탁했다. 허수경 시인은 1964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1992년 독일로 떠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허수경 시인은 2018년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저서로는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 <오늘의 착각> 등이 있다. 박준 시인은 허수경 시인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지만 허수경 시인의 시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급하게 발문을 부탁드렸다. 그러나 독일에 머물던 허수경 시인은 일 년을 더 쓰고 시집을 내도록 권고했다. 퇴고와 새로운 시를 추가하면서 충분히 시집을 더 가다듬는 시간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 '를 써 주었다. 발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누군가 새 출발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아내었을 어떤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삶은 얇은 얼음장이라고 했다. 시적이라는 것은 균열의 순간을 온전히 자신 속에 담아 두지 못할 때 온다. 그 무질서의 느낌 속에서 한 인간은 완벽한 개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도 누구의 고통과 느낌을 재현하지 못한다. 각자에게는 고유함이 있기 때문이다. 시집 역시 그렇다. 순간을 영원이라는 엉성한 공간 안에서 서먹한 퍼즐 조각처럼 널려 있다. 이 순간들이라는 퍼즐 조각을 들어 올려본다. 박준의 글쓰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배움이 없던 아버지는 당시에 현대문학 책을 보셨고 시를 외우셨다. 박준은 평소 아버지가 툭 툭 던진 말들을 놓치지 않고 시를 쓴다.
그의 시는 아픔으로 시작하는 시가 많다. 젊은 박준은 보기와 달리 잔병치례가 잦았다. 미열이나 간헐적 아픔이 많다. 편도에 인두나 면역계 등 동네 내과 단골손님이 바로 그였다. 그는 아플 때 오히려 좋다고 한다. 일상을 살다가 아플 때 시가 잘 써지기 때문이다. 박준은 삶에서 크게 기록할만한 일들을 빼면 사소한 일중에 가장 큰일은 밥 먹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시를 쓰는 일도 사소한 일들의 마음이다. 그가 시집의 제목에 대해 말했다. 그가 존경하고 좋아했던 선배 중에 부와 권력을 가지지 못했던 분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박준 시인은 의약 분업하기 전 약국에서 며칠씩 약을 지어다 먹던 일을 떠올렸다. 누군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약을 지어다 먹을 수 있을 때처럼 든든할 때가 있다. 박준은 늘 그렇듯 글과 글이 만나는 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다.
요즘은 책과 영화 리뷰에 관심을 갖고 쓰고 있지만 쓰고 싶은 건 시 쓰기이다. 앞으로는 시에 대해 더 관심을 갖으려 한다. 2006년 시인으로 등단을 했지만 이제는 시인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그러나 한참 전에 시를 썼듯이 기회가 되면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있다. 너무 어렵지 않은 그렇지만 깊이가 있는 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편하게 읽힐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 내 삶에 가장 밑바닥에 욕구는 시인으로 불리고 싶고 쓰고 싶은 것은 시이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보고 싶은 사람처럼 시가 찾아와 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