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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미영 sopia Oct 24. 2023

책 리뷰 -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인플루엔셜 /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247page

팬더믹 시대에 대한 우리의 성찰


얼마 전에 브런치 스토리를 통하여 인플루엔셜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10월 출간할 책이 있는데, 읽고 리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무기력한 시대에 어떻게 삶을 회복할 지에 대한 책이라고 해서 읽고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은 프랑스 작가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극심한 팬더믹 시기 동안의 성찰을 담아낸 책이다. 21세기는 기후 위기와 코로나 사태, 전쟁등으로 위협을 더해가고 있다. 2020년 1월부터 시작된 팬더믹의 사태는 수십억 인구에게 비극이었지만 신중함과 대담함, 유목민과 정주민, 바깥세상의 개척자와 밀실 탐구자를 둘러싼 논쟁에 불을 지폈다. 우리는 한동안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공포를 겪었으며 무섭기도 했고, 무기력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 손을 잘 씻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수백만 명을 죽였고, 이동 제한에 심하게 압박을 받았다. 팬더믹의 상황은 여행자들이 따라야 할 조건들이 점점 엄격해졌다. 게다가 온라인 서식, 증명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검사, 일일이 셀 수 없는 큐알코드에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했다. 당시에는 '혹시 이대로 지속되면 어떡하지?' 하며 극도의 불안감을 갖기도 했다. 올해 10월 현재는 거의 팬더믹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다행이다. 저자는 팬더믹 상황에서 갇혀 있었던 상황과 점점 채택근무와 개인주의를 흐르고 있는 현실에 바람을 초대할 것을 권한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어디든 부는 바람처럼 우리의 삶도 도전과 모험이 어우러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았다.


저자는 되도록 가능성의 문을 많이 열어 놓으라고 당부한다. 진짜로 '산다는 것'은 가능성의 장을 끝까지 달려보는 일이라고, 기꺼이 밖으로 나가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팬더믹 기간 동안 대면 접촉과 외출도 그리고 모임도 하지 못했다. 재택근무를 하니 직장상사를 만날 일도 없고 일상복을 입고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경이로운 후퇴이며 집콕의 기쁨이라고 선언했다. 게다가 야간통행금지, 입을 가리는 마스크, 제한된 행동들, 거리 두기는 우리를 구속했지만, 오히려 해방된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자가격리 경험이 일종의 장기휴가처럼 받아들일 줄 누가 예상이나 했던가? 우리는 자주 소음과 골칫거리 일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소박하게 살기를 원한다. 저자는 앞으로도 팬더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일상화되고 평범한 골칫거리 중 하나로 흡수될 거라는 것이다. 코로나 19는 위험한 바이러스 질환이지만 치명률이 낮은 질병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이제 바깥세상은 피상적인 것이 되었다. 인터넷이 온 세상을 집 안으로 데려온 덕분이다. 각자의 집이나 방도 그 자체로도 소우주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해야 한다. 신체의 냄새, 소리 빛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해 우리는 나가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

호수의 작은 나룻배


지구촌과 이동통신 그리고 은둔자들


인간의 불행은 자기 방을 떠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되며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건 무기력이고 죽음과도 같은 권태라고 주장한다. 앞으로는 진짜 활동다운 활동은 특권층의 호사가 되고 무위도식은 가난한 자들의 짐이 될 거라 전망한다. 머지않아 노동이 부유한 사람들의 몫이 된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서민들은 쉬고 여가를 즐기면서 그러나 기분전환에 목말라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듯이 20세기말에 등장한 휴대전화는 천제적인 발견이다. 우리는 휴대폰으로 다른 대륙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흥미로운 정보와 충격적인 뉴스나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가득 품은 스마트폰 한대만 있으면 밋밋한 일상에 특별한 재미와 흥미를 더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편리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사건건 옭아매여 너무 휘둘리는 건 아닐까?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꺼두거나 의식적으로 잊으려 해도 잠시 휴대폰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찾게 되면 편안한 안도와 반가움을 갖게 된다. 스마트폰은 이제 거의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식사하는 도중에 버스나 열차에서도, 거리를 걸으면서도 심지어 사랑을 나누다가도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든다. 밀려드는 지인들의 소식들과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정보가 작은 휴대폰 안에 넘쳐난다.


저자는 고행자, 독방 생활자, 운둔자가 먼저 진부한 일상에 짓눌러 나가떨어지기 쉽다고 했다. 그래서 수도사를 밤낮으로 심리적 공간을 기획하고 다양한 일거리를 계속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침묵하는 신에게 바치는 기나긴 기도이기 때문에 더 좌절이나 공동생활의 무기력에 노출되기 쉽다고 한다. 수도사는 미사, 찬양, 무릎 꿇기 등 광적으로 의례를 챙긴다. 자료를 찾아보고, 베껴 쓰고, 전달하는 일을 예전에는 수도사들이 맡았었다. 이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그리스어, 라틴어 문헌들을 망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미니멀라이프 실천자로 검소하고 엄격한 사규를 정했고 수도원의 규칙과 삶을 합쳤고 이를 공장이나 사무실, 학교, 병원의 청사진이 되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한 신성한 타자였고 루소는 못된 말을 퍼붓는 사람들이 타자였다고 한다. 성찰하며 기도하고 기억을 되새기는 일은 멀리 있는 타자와 대화한다는 행위이다. 저자는 이대화를 잃으면 마음의 곳간은 텅텅 비어 버린다면서 집이 사색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방에 틀어 박히는 것은 바깥세상을 저버리기 위함이 아니며 돌아가기 위해 유예 상태에 둔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밖이 없다면 안은 존재의 이유를 잃을 수 있다고 했다.

미동산 수목원 물레방아

우리는 집에 있어도 방송을 수신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집을 꾸민다는 것은 일단 익명성의 마법을 풀고 자신의 흔적과 발자국을 확실하게 남기는 일이다. 조그만 선을 넘어도 탄소 배출량이 늘어나고 지구는 회복이 늦어질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개인별 '에코미터'가 도입될 수도 있다. 봉쇄는 공간의 축소와 시간의 팽창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봉쇄 이후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언제나 열중해야 할 것은 "살짝 열린 틈새의 형이상학"이다. 저자는 삶이란 떠날 때나 돌아올 때나 거치기 마련인 문지방에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방과 집이 동네로, 거리로, 주위의 들판으로 통해 있을 때만 자기 확장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방과 집은 새로운 운명과 맞닿은 언저리를 향하여 열려 있는 귀가 된다.  방구석 여행의 장점은 비용이 들지 않고 아무 위험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없거나 겁이 많고 게으름을 부리기에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편안하고 따뜻한 방, 책, 펜, 권태에 맞설 수단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달콤한 명상에 빠지거나 아늑한 침대 속에서 깊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좋다. 나를 들여다 보기에 최적이다.  그러므로 집이나 방은 다채로운 잠재력 이동의 출발점이며 풍요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질서 속에서 삶의 방향 찾기


저자는 21세기초에 두 가지가 변했다고 한다. "공포의, 공포에 의한, 공포를 위한 정치"가 세계 차원에서 부상했다. 특히 기후, 테러, 팬데믹을 중심으로 한 NGO드로가 UN의 활약에 힘입어 전 세계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세계가 연결되고 진정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사람들의 정신은 전지구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네트워크 사용자들은 현실과 비슷하게 파벌, 소속 집단, 특정한 공통점에 근거해 끼리끼리 모인다. 일본에서는 단절된 젊은이들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사교성이 낮고 오랫동안 햇볕을 보지 않아서 낯빛도 창백하고 밤낮없이 화면만 들여다 보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방에서만 밥을 먹기 때문에 식판이나 쟁반에 차려서 문 앞에 놔줘야 한다. 자주 화면을 바라다보기 시작하면 현실은 사라진다. 동영상을 많이 본다는 것은 그만큼 자율성을 점차 잃는 거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청소기, 밥솥, 커피메이커 등 고급 가전제품도 편하지만 실상은 자꾸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건 아닐까 반성하게 한다.

어느 카페 정원 풍경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야 할까? 지구 온난화? 팬더믹? 테러? 전쟁? 공포라는 관점에서 이 모든 경고의 효과는 동일하다고 한다. 젊은 세대가 악몽에 시달리고, 미래를 더 이상 믿지 않고, 말세를 기다리며 굴속으로만 숨어든다면 안될 것이다. 밖은 온통 심연이기 때문에 신중함과 관성이 혼동되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를 마비시키는 불안이 있다면 우아함으로 맞서라고 조언한다. 강하게 만드는 건 도피가 아니라 역경과의 정면 대결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화를 유지하고 살아가면 좋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다 이스라엘의 전쟁까지 끊임없이 총과 탱크 그리고 폭격이 가해진다. 최악의 시련에서 빨리 빠져나와서 우리 모두가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며 살아가길 기원해 본다. 저자는 인간이 홀로 칩거하려는 경향은 중세 수도원에서부터 존재했고, 고립으로 인해 문제도 더불어 발생되었다고 언급했다. 저자는 칩거에 익숙한 인간이 정신적. 신체적 무기력을 학습하는 것을 가장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제는 채택근무가 점점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사회 속에서 일탈하여 혼자 머물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팬더믹 시기가 끝나고 다시 시끄러움과 무질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정신적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깊게 차단이 됐던 시기가 꼭 나쁘지만 않았다고 그때도 괜찮았다고 기억되고 있으니 언제나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팬더믹의 시험은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는지, 이전의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알려 주었다. 저자는 수도사들이나 방구석의 생활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소통하며 함께 하기를 권한다. 혼자 생활은 가능하지만 안주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인간은 빛과 탐색의 존재이다. 자신에게 멋진 일이 일어나길 원한다면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 모든 시간, 모든 날은 비슷하지만 살짝살짝 다르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소설에서 이야기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 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는 명언을 떠올려 본다. 저자는 '살짝' 방대한 모험이 있고 가슴 뛰는 불협화음이 있음을 조언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살짝의 다름 속에서 우리는 마땅한 도전과제를 마주하면서 역경에 부딪치며 헤쳐가야 할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삶의 방향을 잘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갈대숲과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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