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청남대에서 마음 정리와 다짐

2025년 12월 30일

by 신미영 sopia

연말 특유의 분주함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12월 끝자락에, 겨울의 고요함이 깃든 곳을 찾다 자연스럽게 청남대로 발걸음이 향했다. 자가용으로 30분이면 갈 수 있기 때문에 대청댐도 바라볼 겸 가끔 일부러 간다. 대청댐 들어가는 길에 은행나무 잎들이 11월 초만 해도 노랗게 물들어 있었는데, 바닥에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앙상하다. 그래서 그런지 대청댐의 모습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청남대 들어가면서 대청댐을 마음으로 담고 카메라에도 담았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내려놓은 채 겨울을 견디고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호수와 산자락은 꾸밈없이 담백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드는 풍경이었다. 청남대 들어가는 길에는 계절마다 느낌이 다르지만 다 나름으로의 특색이 있어 좋다. 바람은 별로 불지 않았고 해가 나서 다행이다. 청남대 매표소에 도착하니 오전 11시쯤 되었다. 차에서 내리자 파격적인 조형물이 눈에 들어와 카메라에 담았다. '왜 이걸 여기에 해 놓았을까?' 궁금했지만 표를 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으나 막상 청남대에 들어서자 마음은 오히려 잔잔해졌다.

청남대 입구

우측으로는 대나무가 겨울에도 푸르름을 빛내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청남대는 1983년 6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준공했다. 1986년 따뜻한 남쪽 뜻의 '청남대'로 개칭되었다. 올라가면서 우측으로 전 대통령 분들이 사용하던 청남대 집기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께서는 골프를 치셔서 그 유품들이 있었고 보기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가장 검소하게 생활하신 듯했다. 당시의 물품들을 이렇게 정리해 놓은 것도 그분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가훈을 써 주는 곳이 있었다. 한지에 써 주는 건 무료이고 전시품처럼 걸어 놓을 수 있는 건 3만 원이다. 우리는 有志竟成의 사자성어를 선택해서 한지에 부탁을 드렸다. 초지일관과 비슷한 문장으로 '뜻을 가지고 꾸준히 밀고 나아가면 결국 이룬다'는 사자성어이다. 쓰시는 분의 붓끝 필체가 힘이 있고 유연하다. 우리는 글씨가 마르도록 한쪽에 두고 다른 곳들을 더 구경했다.


위쪽으로 쭉 울라 가니 청남대 문이 보이면서 양쪽으로 반송이 심겨져 있다. 한국 원산의 상록칩엽 교목으로 줄기 밑 부분에서 굵은 가지가 갈라지고 나무 전체가 반원형 솔방울이 적으며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청남대에 50여 본이 식재되어 집중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머리를 잘 다듬어 놓은 것처럼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어 보기 좋았다. 청남대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1층은 회의실, 접견실, 거실과 손님실이 갖추어져 있다. 다섯 분의 대통령께서 가끔 이용한 A급 보안 시설로 유일한 대통령 휴양 시설이었다. 개방 전에는 대청댐 입구부터 군인들이 철문을 지키고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이렇게 개방 후에는 아무 곳이나 편안하게 다닐 수 있어 좋다. 접견실과 거실, 대통령 침실등을 둘러보았다. 접견실은 외빈을 맞거나 공식 업무를 보고받았던 장소이다. 휴식을 목적으로 오는 장소이기 때문에 거의 사용을 안 했다고 한다. 청남대는 2003년 4월 18일부로 충청북도도 이양되어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달력과 시간들이 멈춰 있다. 20여 년간 청남대는 대통령 제2 집무실의 기능을 하지 않게 된 것에 착안을 한 것이다.

청남대 본관 실내

우리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심겨 있는 연못 부근을 산책하다 그곳은 지난번에 다녀와서 발걸음을 초가정 가는 쪽으로 옮겼다. 대청댐을 바라보며 걷고 싶어서였다. 전에 대통령님께서도 국정을 돌아보고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며 새로운 구상을 하기 위해 많이 걸었을 것이다. 임시정부 광장에서 초가정까지 이어진 민주화의 길은 김영삼 대통령이 새벽마다 즐겨하시던 조깅을 위해 500여 미터를 추가 증설한 산책로라고 한다. 광장(구 골프장)의 잔디밭과 마사도로, 낙우송이 대청호반과 어우러져 사계절 모두 호젓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무뿌리가 위로 불쑥불쑥 올라와 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으나 이것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니 멋진 풍경이 된다. 훤히 트인 대청댐을 바라보고 걷는 길은 마음까지 확 트이게 한다. 그래서 이 길은 영화, 드라마, CF 촬영의 명소이기도 하다. 휴식과 오찬을 즐겼던 그늘집과 초가정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대청호를 바라보는 경관은 쌓인 피로를 잊게 해주는 힐링 코스라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초가정까지는 어렵겠지만 평편하고 넓은 길에는 유모차와 휠체어로 통행이 가능하다. 이날도 다리 불편하신 어른이 타고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남대 임시정부와 초가정 가는길 대청댐

대통령 별장으로 널리 알려진 청남대는 넓고 잘 정돈된 산책로 덕분에 걷는 내내 부담이 없었다. 남편과 나란히 걸으며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고 괜찮은 시간이었다. 말보다 침묵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올 한 해를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겨울의 청남대는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사람들의 발길도 비교적 한산했고, 그래서인지 공간 전체가 조용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함께 걷는 우리 둘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올해를 잘 버텨냈다는 생각과 함께, 다가올 새해도 이렇게 천천히 걸어가면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거창한 계획이나 다짐 대신, 서로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 시간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겨울의 청남대는 조용히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남편과 함께한 이 짧은 산책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무언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돌아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찾아가면 청남대는 엄마의 품처럼 편안하게 맞아준다. 그래서 청남대 안에 들어가진 않아도 대청댐을 가끔 찾아 위로를 받고 마음을 정리하기도 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이곳이 있어 좋다. 겨울의 청남대는 조용했다. 잎을 모두 내려놓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은 화려함 대신 여백을 내어주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올해 내내 쌓아두었던 생각들이 하나, 둘 느슨해졌다. 한때는 선택받은 사람만 드나들 수 있었던 공간.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산책로가 되어 뿌듯하다. 설명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닫힌 장소가 열렸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권력의 흔적보다 사람의 발걸음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사진 몇 장, 천천히 걷는 걸음, 짧은 생각들이면 충분했다. 나에게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잘 버텼다고, 이 정도면 괜찮았다고.

청남대에서 바라본 대청호수

청남대의 길을 걷는 동안, 시간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빠르게 결정하고 서둘러 살아오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과 고요한 호수의 물결은 앞으로의 계획을 촘촘히 세우기보다 비워두는 여백의 중요함을 일러주었다. 청남대에서 보낸 시간은 무언가를 더하기 위한 계획이 아니라, 덜어내고 숨 쉴 틈을 남겨두는 나만의 삶의 설계였다. 청남대의 길은 말이 없었고,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내 마음의 소리가 또렷해졌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뤄두었던 질문들이 나무 사이, 물가 옆에서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맡기신 하루를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겨울의 청남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정직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분명해졌고, 욕심보다는 감사가, 계획보다는 신뢰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자리 잡았다. 무엇을 더 이루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겠다는 다짐이었다. 주어진 자리에서 충실하게, 조급하지 않게, 그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삶. 청남대에서 남편과 함께 보낸 이 시간은 삶의 방향을 다시 그려보게 한 사랑과 은총의 시간이었다.

청남대에서 받아 온 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