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동기 같은 건 없었다. 휴가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저 여행부터 떠올리게 될 뿐이니까. 시간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나길 기대한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섣불리 타국으로의 여행을 꿈꿀 순 없었다. 어딜 갈까 생각하다, 다랭이 마을에서 봤던 남해 바다가 떠올라 목적지는 남해군으로 정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으므로 그냥 홀로 떠나기로 한다.
느지막이 일어나 한참을 꾸물대다 짐을 챙겼다. 그리 길지 않은 여행임에도 이것저것 꾸릴 게 많다. 차를 가져갈 거라 짐이 좀 많아도 상관없지만 보통의 경우 짐은 줄일수록 좋다. 반드시 필요한 것만 챙겨 최대한 가볍게 떠나야 한다. 여행자가 등에 진 배낭의 무게는 그의 인생의 무게라고 류시화는 썼다. 역시 생각도 짐도 덜어내야 한다고 되뇌이며, 입지도 않을 티셔츠와 바지를 낑낑대며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짐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길마저 아름다운 여행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여행이란 게 별 거 있겠는가. 내 마음이 여행자 모드가 되면 그 순간부턴 모든 게 여행인 것이다. '여행자의 마음'은 사람을 느슨하고 싱겁게 만든다.
시동을 걸고 도로를 타면 본격적인 여행의 길목에 들어선다. 얼마 전 개통한 서부 지하도로를 통과해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길은 예상보다 더 막힘이 없었다. 교통체증도 신호도 없는 직선 구간의 고속도로. 지도를 멀리서 보면 서울에서 남쪽 바다로 가는 길은 거의 수직선에 가깝게 느껴질 만큼 반듯하다. 핸들을 살포시 잡고 정속 주행을 하자 빨갛고 노랗고 파란 11월의 산과 하늘이 날 통과해 지나갔다. 느긋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흐르는 풍경을 감상했다. 마치 최신 자동 주행 차량에 탑승한 듯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비수기 평일 자동차 여행의 맛이여.구름이 잔뜩이라 빛은 또 얼마나 부드럽고 온화한가. 비가 오다 막 그쳤을 때의 구름 낀 이 진득한 날씨를 나는 좋아한다.
유유자적 흘러간 노래를 들었다. 유튜브 뮤직의 알고리즘은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김진표, 조PD, 허니패밀리의 익숙한 랩 음악을 연달아 들려주었다. 바로 어제 가사집을 읽은 것처럼 꽤 긴 마디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청년기 내 음악적 취향은 썩 대중적이지 못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홍대병 같은 게 있었다. 진짜 음악은 가요톱텐 무대가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의 언더그라운드 무대 위에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유튜브 뮤직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가요톱텐에서나 나오던 노래를 선곡하자, 나는 또 나름대로 신이 나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테레비와 라디오,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대중가요의 잔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니. 제목도 가수도 모르는 노래의 친숙함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청년 무명의 설익은 이분법은 그 시절 인기가요의 선율을 따라 녹아내렸다.
여섯 시간에 걸쳐 남해에 내려가는 동안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해가 쨍하다 어느덧 구름이 몰려들어 비를 뿌리고, 한줄기 빛이 비치며 날이 개길 반복했다. 와당탕 쏟아지는 비도, 물뿌리개로 칙 흩뿌린 듯 내리는 비도 있었다. 덕분에 왼 손으로 와이퍼 동작 속도를 계속 조정해야 했다. 현재의 상황에 맞춰 무언가를 끊임없이 조작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일은 묘한 즐거움을 준다. 강수량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지점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재빨리 와이퍼 속도를 낮추고 올리길 반복하다, 와이퍼가 메트로놈처럼 비트를 따라 움직이면 쾌감이 배가 되는 것이다. 혼자 놀기 고수의 웃픈 현실이었다. 복잡한 인생의 문제도 이렇게 버튼 조작 하나만으로 대처할 수 있다면 참으로 명쾌할 텐데.
길눈이 어두운 난 늘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다닌다. 익숙한 길도 내비의 안내를 받으면 더욱 든든함을 느끼는 유형의 운전자다. 어린 시절 가족여행을 떠날 때 아빠는 지도책을 뒤적이며 길을 헤매다 결국 마을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목적지에 도착하시곤 했다. 덕분에 아빠의 머릿속엔 대한민국 주요 도로가 선명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다. 내비바보인 나로선 그야말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세상에서 내비가 사라진다면 나는 내비바보가 아닌 그냥 바보가 될 것이다.
숙소 주변에는 밥집이 없어 미리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지도 어플에 '중국집'을 검색해 별점 순으로 나열하고 숙소에서 가깝도 평도 좋은 곳을 선택했다. 중국집의 기본 메뉴인 짜장면을 곱빼기로 주문했다. 가게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하고 묻자 주인아주머니는 너무 더러워서요, 좀 치우고 이따요, 하며 둘러둘러 완곡한 거절 의사를 내비친다. 거창해 보이는 까만 카메라를 들고 들어온 덩치 큰 외지인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당황스러울 터였다. 뻘쭘해진 난 아주머니께 남해 여행지 추천을 정중히 부탁하며 짜장면 한 젓가락을 호로록 들이마셨다. 아,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다. 너무 짜거나 달아 입에 마구 들러붙지 않는. 그렇다고 심심한 맛도 결코 아니었으니 준수한 동네 맛집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짜장면 맛에 감탄하며 면치기를 하던 찰나 아주머니가 입을 떼었다.
"뭐, 어디가 딱 좋다기보다... 지나가면서 보면 아 여기 참 멋있네, 싶은 데가 많죠."
아주머니는 여기가 좋아요, 저기가 좋아요 하는 대신 여기서 저리로 가는 길이 참 좋아요, 하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몇 년 전 터키에 갔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고속버스를 타고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길목에서 마주친 차창 밖 광활한 대자연의 풍광이었다. 하늘과 바다와 호수가 구름과 태양빛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내보이는 다채로움에 입울 다물 수 없었다. 가이드북에서 지명을 발견할 수 없는,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동선 정도로만 치부되는 곳들이었다. 명소라 불리는 관광지를 출발지와 도착지로 삼았지만 정작 가장 아름다웠던 건 그 사이에 놓인 이름 모를 도롯가 풍경이었던 것이다. 막상 도착한 목적지는 관광지 특유의 인파와 부산함으로 실망만 안겨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은 과정 안에서 마주친다. 서울에서 남해까지 내려오는 길목도 그러했다. 몇 번인가 차를 멈추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지만 고속도로 한 복판에 차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멈춰서 볼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풍경들. 내가 마주친 길목들을 회상하며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4인실에 나뿐이었다. 사장님은 정말 사람 없을 때 오셨네요, 하셨다. 내심 바라던 바였다. 아담한 크기의 방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게스트들의 공용 공간인 카페에 들어서자 목재 작업대 위에 널브러진 가죽 뭉치와 망치, 붉은색 조명에 비친 멋스러운 LP 플레이어와 커다란 스피커가 눈에 들어왔다. 인테리어에서 주인장의 안목과 세심함이 느껴졌다. 마초처럼 보이는 털보 사장님은 실은 아기자기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카페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간 국순당 생막걸리를 마셨다. 하루에 두 통씩 마실 요량으로 우선 네 통을 사 왔다. 안주로는 익숙한 매새(매운 새우깡)를 골랐다. 양주잔에 막걸리를 따라 한 입 쭈욱 들이키고 새우깡을 아자작 씹었다. 단짠단짠! 만족감이 혀를 타고 위장으로 들어가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장수 막걸리와 맛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장수가 얇고 가벼운 맛이라면 국순당은 묵직함이 한층 더해져 있었다. 가벼운 것도 묵직한 것도 나는 제각기 좋다.
마음에 든다. 먼 길을 달려오며 스친 무명의 풍경부터 지역 맛집의 짜장면, 달달한 막걸리와 짭짜름한 과자, 아늑한 숙소와 카페에 울려 퍼지는 털보 사장님의 무두질 소리까지 전부 다. 연거푸 달콤과 짭짤을 오가며 일기를 쓰다 막걸리 두 통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숙소 침대에 누웠다. 나른한 취기에 미리 켜 둔 전기장판의 온기가 더해져 기분이 거나해졌고, 이내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