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의 신용은 점토판에 기록된 문서 계약으로 발전했고, 이후 법적 효력을 가지는 제도적 금융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이는 단순한 금전 거래를 넘어 사회 구조, 계약 질서, 법적 제재를 포함한 복합적 시스템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용 거래는 대개 실물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차용의 대상은 은, 보리, 섬유, 가죽, 토지 사용권 등이었다. 주요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채권자와 채무자
계약의 진위를 보증하는 증인
토지, 가축, 자녀, 노동력 등의 담보
이자율 관행: 곡물 33%, 은 20%
상환 기한과 위약 조항
신용 거래는 설형문자로 새겨진 점토판 차용증(I.O.U tablets)으로 남겨졌으며, 이는 현대의 차용증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대표적인 문서 구성은 다음과 같다:
A가 B에게 은 10세겔을 빌림, 1년 후에 상환할 것, 이자율은 20%, 증인은 C, D.
— 우르 제3왕조 제5년
계약 이행을 문서로 강제하였으며, 추후 분쟁 시 법정 문서로 활용되었다. 문서는 거래 양 당사자 외에도 증인, 때로는 서기관의 봉인이 함께 기록되었다.
신용의 핵심은 신뢰이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담보를 통해 물질적으로 보강했는데, 대표적인 담보 형태는 다음과 같다.
토지 담보: 일정 기간 동안 채권자에게 경작권이나 수확 일부를 넘김
노동 담보: 채무 불이행 시 채무자 또는 가족이 노동력으로 상환
자녀 담보: 아들 또는 딸이 일정 기간 노동 노예로 제공됨
보증인 제도와 결합되어 공동 책임을 형성
이는 단순한 계약이 아닌, 사회적 신분과 생계 기반을 담보로 한 금융 구조였다.
기원전 3000년경에는 아직 왕령에 따른 법정 이자율 제정 이전이므로 관행에 따라 다음과 같은 비율이 적용되었다.
곡물 대출: 연 33%
은 대출: 연 20%
이는 실물 자산의 저장성 및 보관 비용 차이에 따른 것이며, 자산 유형에 따라 이자율이 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자율은 계약서에 명시되었고, 점토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타난다.
은 10세겔을 빌림, 1년 뒤 12세겔로 상환할 것
보리 30쿠르를 빌림, 추수기에 40쿠르로 상환할 것
채무자가 상환을 지체하거나 불이행할 경우, 다음과 같은 절차가 진행되었다:
증인의 진술을 통해 채무 존재 확인
서기관 또는 재판관의 판결을 통해 담보의 몰수 또는 인적 노역 판정
사원 또는 궁전이 개입하여 공적 문서 기록 보관소에서 원본 확인
이로 인해 신용 거래는 단순한 개인 간 거래가 아닌, 공공질서와 법적 안정성을 전제로 하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신용 거래는 농업 생산과 생활 자금에만 그치지 않고, 상업적 무역 자본 조달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상인 계층(damgar)은 사원이나 귀족으로부터 자본을 차용하고 장거리 무역을 수행하며, 이후 이익금을 정해진 비율로 분배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무역 금융(trade finance) 또는 투자 조합(partnership)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상인은 손실 발생 시 일정 범위 내에서 책임을 면제받는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하기도 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용 거래는 단순한 자금 융통이 아닌, 사회적 신뢰 구조와 문서 제도, 법적 강제력이 결합된 복합 금융 구조였다. 점토판 문서를 통한 기록, 증인 체계, 담보 제도, 이자율 관행은 이후 고대 근동 전체의 경제 질서를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신용 구조는 함무라비 법전의 등장 이전부터 이미 고도로 정교한 형태로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