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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08. 2019

벌레의 삶을 증언하기

박완서가 말하는 작가의 소명(독후감)

  자전적 이야기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 속에서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픽션 속에도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육성은 자전적 이야기 속에서 가장 잘 들린다. 20여 년 전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이야기 속에 문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재미있고 실감 나는 이야기는 몰아의 경험을 제공하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잊게 만든다.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개성 아래 박적골이라는 동네로 나를 순간 이동시켰다. 문명화된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결코 위생적이라 할 수 없는 아이들의 자연친화적인 놀이가 있는, 그리고 남녀차별과 반상 구별의 법도를 지키려 애쓰는 어른들의 안간힘이 있는 작은 마을에는, 그런 법도라는 것에 순응하는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넘겨버릴 줄도 아는 여자들의 여유가 있었다.


  시골 동네에서는 유일하게 학식과 뼈대가 있는 집안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로 할아버지와 친척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작가가, 딸을 신여성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어머니의 집념에 의해 순식간에 낙원을 떠나 지옥 같은 서울생활에 적응하는 이야기가 이 책의 전체 줄거리이다. 일제 말기와 광복, 6.25 전쟁이라는 격변의 시기가 아니었다면 작가의 성장 이야기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서글펐다가 마침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가족의 생활을 비틀어버리는 사건들이 하나씩 터지면서 가족원 각자의 내면에도 예측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의 일정표에는 작년에 메모해두었던 독후감 공모전 마감일이 7월 31일로 나와 있었다. 이 공모전의 도서목록을 살펴보니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가 있었다. 20년 전 그때처럼 나는 다시 이 책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읽고 나니 '그 많던 싱아'가 나에게 그처럼 강력한 인상을 남긴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저자와 닮은 곳이 많았다. 사랑을 듬뿍 받은 어린 시절, 의지력 강한 어머니,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한 일,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성격, 독서벽 같은 것이 매우 비슷했다. 박완서는 내가 언감생심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훨씬 전부터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였다. 이 책을 다시 읽으니 내가 그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은 것 같아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2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고 또 그때와 달리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읽고 있다. 아니 이 책이 내게 글쓰기의 목적을 계시해주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지난달 우연히 알게 된 어느 공기업의 사회공헌사업을 통해 나는 한 권의 책을 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실은 책 쓰는 연습을 시켜주는 프로젝트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강제로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한 달 안에 50페이지 이상의 글을 써내야 한다. 첫 강의를 듣기 전부터 나는 치매에 걸린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최근 반년 간 내 머리와 가슴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내 아버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되어서가 아니다. 내 속에 있는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지 않고는 자아가 분열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의 애인이자 우상이었던 아버지가 지금은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매일 같이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어머니와 나를 괴롭히고 있다. 가장 힘든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존재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나를 용납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온 것은 내가 그런대로 괜찮은 인간이라는 자아상이었다. 키가 자라면서 부모에 대해 실망도 같이 커졌지만 내 부모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더 많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그럭저럭 가능했다. 결혼 후의 적응이 내게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아버지와 너무 다른 냉정한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이 주는 불편함이 클수록 솜털처럼 따뜻한 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더 커졌다. 상대적으로 내 남편은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나의 내면에서 늘 친정아버지와 비교당하며 불리한 경쟁을 해왔다. 밖에서는 하염없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자기를 집에서만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불평하였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기까지 한 나의 아버지가 내 마음속에 신화 속의 신처럼 자리 잡고 있었으니 남편에게는 불공평한 경쟁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최고의 아버지를 둔 내가 최악의 남편을 만났다는 불행감은 결혼 후 이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는 최고의 아버지였으나 성장하여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딸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미저리가 되었다고 해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중년기 이후 아버지는 가족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가족밖에 없었다. 손자 손녀들에게도 무한한 애정을 쏟아붓는 아버지는 본인도 그런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다. 본인이 원하는 사랑과 충성이 돌아오지 않으면 섭섭하다는 표현도 잘하셨다. 아버지의 치매는 그의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이 많아 걱정도 많고 가족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으니 계속해서 자식 걱정만 하시고, 그러다 보니 우울증과 불안증에 사로잡히셨다. 아버지가 치매진단을 받은 것은 이러한 걱정이 망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내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가 정말로 기록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객관적 관찰과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아버지의 실체를 찾아볼 것이다. 치매는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질병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활동에서 소외된 노인들에게 이 병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보면 치매는 분명 성격적, 행동적 기원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이 땅의 수많은 치매환자 가족들과 소통하고 싶다. 자신의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이 병의 기원과 위험요인을 찾아냄으로써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어줄 수도 있고 치매환자 가족들 자신도 미래에 치매환자가 되는 불행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순간 작가는 ‘천지에 인기척이 사라진 거대한 공허가 주는 공포감’을 느끼며 ‘그때 문득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고 말한다. 그 장면을 자신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고, 자기만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으리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 순간 작가는 자신이 이 공포감에 맞서기 위해 글을 쓰게 되리라는 운명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말한 책무라는 것은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소명이었다. 한 명의 순진한 문학소녀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역사의식을 불어넣은 것은 죽음과도 같은 공포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고 기억했다.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더 또렷이 기억하고자 했다. ‘벌레의 시간을 증언하지 않고는 벌레를 벗어날 수가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 깨달음이 나에게 계시로 다가왔다. 나는 작가처럼 거창한 역사적 책무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나만이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책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목적과 사회•역사적인 목적은 분리될 수 없다. 나는 나를 치유하기 위해 글을 쓸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내 글이 나와 비슷한 씨름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게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로보기처럼 용기를 요하는 일은 없었기에 뼛속의 진까지 다 빼주다시피 힘들게 글을 쓰고 난 후 나는 지쳐 있다’고, 그래서 ‘위안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위안을 구하는 작가의 말이 어째서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 그가 수많은 문제작을 써내고 이미 유명 작가가 된 후에도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토록 어려웠다면 나 같은 아마추어는 오죽할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 이야기를 쓸 충분한 용기와 명분을 얻었다. 작가는 '그 많던 싱아'를 쓰면서 그것을 읽어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의 민낯을 볼까 봐 두려움이 컸을 수도 있다. 아직 작가도 아무것도 아닌 나는 우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이다. 그러나 리베카 솔닛이 한 말,‘이야기의 숲과 고독 그 너머에 건너편이 있고 그 건너편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그 말을 기억하며 고독한 글쓰기를 할 용기를 얻는다. 한 사람이면 된다. 한 사람만 나의 이야기에 반응하면 된다. 그의 반응을 내가 듣든지 못 듣든지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온 세상의 책 읽는 사람들을 믿는다.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책을 펼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만의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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