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내 인생

자전적 장편(掌篇)소설

by 이소라

나는 여덟 살인데다가 동생을 둘이나 보았는데도 아직 덜떨어진 인간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침, 나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빨간 쫄쫄이 스웨터 위에 거즈 손수건을 달고 있었다. 식의 시작을 기다리며 운동장에 모여 있던 아이들과 어른들은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떠밀려 강당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몸에서 떨어진 빗물 때문에 바닥은 미끄러웠고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일학년 몇 반임을 나타내는 숫자가 써진 피켓이 세워지고 아이들이 그 앞에 줄을 서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강당에 운집한 수백 명의 웅성거림과 높은 습도 때문에 나는 충분히 주눅들어 있었다.

그해 봄, 내게는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예!”하고 큰 소리로 대답해야 한다는 정도의 상식도 없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몇 번 호명하고 나서야 모기 같은 소리로 대답을 했지만, 선생님은 듣지 못하였는지 다시 한번 “이 아무개!”하고 불렀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작정하고 큰 소리를 내기 위해 허파 가득 숨을 채웠다가 “예!”하고 내뱉었다. 간신히 내지른 나의 목소리는 남의 목소리처럼 낯설었고, 그나마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속에 섞여 들어가 버렸다. 선생님은 나의 동작을 보고 내가 이 아무개인 것을 확인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이 스치더니 이내 다른 아이의 이름이 불렸다. 가슴에서 시작된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 순간 학교라는 곳은 내가 무얼 못하는 인간인지 하나씩 확인하는 장소가 되리라는 예감이 몰려왔다.

선생님의 부름에 제때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목소리가 작다는 사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내가 모자란다는 첫 번째 증거였다. 둘째 날부터는 선생님의 부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고 내 이름이 불리면 있는 힘을 다해 대답했다. 하지만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하는 느낌은 학교에 다니는 내내 계속되었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내가 입학식 날 했던 바보짓을 떠벌렸다. 그날의 기억이 이렇게까지 선명한 데는 엄마의 놀림이 한몫했을 것이다. 원래부터 똑똑한 구석이 없었던 나는 그날부터 확실히 ‘쪼다’가 되었다. 더 어렸을 때 나는 리을 발음이 안 되어 자칭 ‘소다’라고 했는데 그런 나를 어른들은 귀여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나를 ‘소다’ 대신 ‘쪼다’라고 불렀다. 속칭 ‘쪼다’는 어리석고 모자라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그 뜻도 모르면서 나는 괜시리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애칭으로 시작된 말이 멸칭이 되어버린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쪼다’는 아니었나보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나를 “쪼다야, 쪼다야” 하고 부르는 말을 듣기가 싫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나는 땅만 보고 다녔다.


내가 문자 그대로 ‘쪼다’임이 증명되는 일들은 끝이 없었다. 나는 매일의 숙제인 단어 열 번 받아쓰기도 하지 못해서 절절매었다. 손에 힘이 없다 보니 획은 삐뚤어지기 일쑤였고, 지우개로 지워서 다시 쓰려면 공책이 더러워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졌다. 아이 셋은 식모 언니에게 맡겨놓고 사교생활에 바빴던 엄마는 잠잘 시간이 다 돼서야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유를 알게 된 엄마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것도 혼자 못하냐? 이 쪼다야.”

엄마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서 연필을 잡고 자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오며 심을 꾹꾹 누르라고 했다. 어둑한 밤,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받아쓰기 숙제를 하는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역시 나는 남들보다 열등한 존재임이 확실했다.

눈 뜨고 우산을 도둑 맞은 나

어느 날은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 없는 살림에도 엄마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로망을 대리만족하려고 나를 피아노 교습소에 보냈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는 없어도 풍금이 하나 있어서 아쉬우나마 손가락 연습은 할 수 있었다. 풍금을 삼십 분 연습하면 보상으로 오 원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시간아 어서 가라, 하면서 풍금을 치고 있었다. 풍금은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야 제 기능을 하는 기계였다. 풀무에 바람이 꽉 차 있어야 풍금 소리가 끊기지 않기 때문에 나는 허벅지에 쥐가 나게 페달을 밟으면서 손으로는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와 달리 풍금은 앞 음을 붙잡은 채로 다음 음을 눌러야 소리가 이어져 들린다. 소위 레가토로 연주를 해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눈으로 악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손과 다리가 각자 자기 일을 해야 했으니 삼십 분 연습이 끝나면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여름 방학을 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우리 집은 마루방에 유리문이 달린 구조였는데 날이 더워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풍금을 치려고 앉은 자세에서는 마당이 내다보였다. 정신없이 풍금을 치고 있는데 뭔가 시커먼 물체가 쓱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별생각 없이 연습을 계속했다.

잠시 후 소나기가 내려서 땀을 식혀주는 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의 빠르고 큰 목소리가 들렸다.

“우산 다 어디 갔노?”

나는 어리둥절하여 엄마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외출할 작정인지 잘 차려입은 엄마는 나를 째려보았다.

“집에 누가 왔다 갔나?” 하는 말을 듣고야 나는 좀 전에 뭔가를 본 것이 생각나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자백했더니 엄마는 따발총 같이 쏘아댔다.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나?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왔으면 누구냐고 물어봐야지!”

“…”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딴짓 않고 풍금 연습을 하는 것만도 내게는 벅찬 과업인데 방범 업무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말을 했어야 했지만, 엄마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가 되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비난의 화살을 다 맞았다.

“아이고, 내가 몬 산다, 몬 산다. 비싼 우산 다 가져가 삐렸네!”

나는 그날 나의 모자람 목록에 또 한 가지를 추가했다. 대낮에 두 눈 뜨고 도둑맞은 아이라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그동안의 행태를 볼 때 나를 키워준 엄마가 계모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가기 시작했던 어느 날 오후였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던 나는 오줌을 참기 어려워 학교 변소에 들렀는데, 등에는 책가방을 메고 손에는 신발주머니를 든 채 용변을 보았다. 볼일을 끝내고 바지를 올리다가 나는 그만 신발주머니를 놓쳐버렸다. 재래식 화장실의 변기 아래에는 끝없이 깊은 오물탱크가 있었는데 그 오물 한가운데에 신발주머니가 박혀버렸다. 인간 분변의 형태와 냄새 어느 것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바지춤을 잡고 변소 밖으로 나와 울음을 터뜨렸다. 신발주머니를 똥통에 빠뜨리다니! 엄마에게 혼날 일과 놀림거리 하나가 추가될 것이 뻔하여 무서움과 서러움이 몰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오륙 학년쯤으로 보이는 키 큰 남학생이 울고 있는 나를 달래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손가락으로 변소를 가리키기만 했다.

“변소? 변소가 왜?”

“신발주머니가, 신발주머니가” 하는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신발주머니의 위기를 파악한 남학생은 내가 열어 놓고 닫지 않은 변소 칸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나와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는 금세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구해와서 변기 구멍 아래로 집어넣었다. 몇 번의 낚시질 끝에 처참하게 변한 나의 신발주머니가 끌려 올라왔다. 그는 나뭇가지에 신발주머니를 건 채로 수돗가로 가더니 그것을 수도꼭지 아래에 내려놓았다. 세찬 물줄기에 오물 덩어리는 씻겨 내려갔지만, 주머니 표면에 배어든 색까지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는 신발주머니 속에 든 실내화를 꺼내어 수돗물에 헹군 후 다시 집어넣고는 “집이 어디야?” 하고 물었다.

그는 나와 함께 우리 집까지 갔다. 내가 냄새나는 신발주머니를 들고 가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우리 집은 학교 정문에서 백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오빠가 있을 때는 나를 질책하지 않았던 엄마는 오빠가 가고 나자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아이고 쪼다야, 오줌 눌 때는 주머니를 내려놓았어야지. 그것도 몰랐나?”

그날 이후 나는 똥통에 신발주머니를 빠뜨린 아이로 한참을 놀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놀림을 받아도 전처럼 비참하지 않았다. 나를 도와준 오빠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혼내지도 않았고 놀리지도 않았다. 그저 “괜찮아, 울지 마.”라고만 했다. 그날은 나의 바보짓에 대해 나를 혼내지 않은 최초의 인간을 만난 날이었다.


그 오빠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우리 가족 밖에도 내 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는 단순히 내 편이었다기보다는 참된 어른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 사람이었다. 가족은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였지만, 동시에 편견을 만드는 공장이기도 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여덟 해를 살면서 나는 인간이 타인의 과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비난과 조롱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 오빠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타인의 잘못에 대해 우리 엄마 같은 태도를 답습했을 것이다.

학교 변소 앞에서 만난 낯선 오빠가 연민과 관용이라는 덕목을 가르쳐준 덕분에 나는, 실수할 때마다 무서워 떠는 겁쟁이의 껍질을 벗고 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정말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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