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독후감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읽으며 나의 소비습관을 점검하게 되었다. 50년 전에 출판된 저작임에도 오늘의 소비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의 부제는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다.
한 줄의 글에 현실을 담아내는 저자의 능력이 압권이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산다고 지적한다. 내가 쿠팡에 플러그를 꽂고 생필품을 받아먹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말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전통시장의 죽음을 염려하던 상황을 넘어 오프라인 마켓 전체의 죽음을 걱정해야 될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각은 판매자들, 나아가 국가경제 전반을 걱정하는 시각이다. 그런데 일리치가 걱정하는 것은 판매자들이 아니라 구매자들이요, 국가경제가 아니라 인간의 사용 가치이다. 소비자들은 ‘산업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갔다’고 그는 말한다.
50년 전의 상품이란 공산품과 서비스상품만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은 농산물도 상품에 포함되기 때문에 소비자의 상품 중독은 더 심각하다. 상품에 중독된 결과는 ‘개인의 재능과 공동체의 풍요, 그리고 환경자원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시장 밖에서 만족을 얻을 기회는 점차 사라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리치의 시대에는 상상도 못했던 음식 배달 서비스가 사라진다면 밥을 굶을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 생각해보면 시장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산업화된 무력함’이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무력함의 결과를 ‘우리 시대에만 겪는 특별한 가난’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또 ‘과도한 에너지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오히려 인간과 인간이 이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수가 많아질수록 전체 자동차가 움직이는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고, 도로망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걸어서 30분 걸렸던 거리가 이제는 횡단보도를 여러 개 지나야 하기 때문에 40분이 걸린다. 혹 승용차를 타고 가면 교통체증과 주차 시간 때문에 더 오래 걸리기도 한다.
어떤 도시계획 전문가가 차도를 강에 비유해서 이야기하는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6차선 도로는 폭이 넓은 강이나 마찬가지며, 횡단보도는 강을 건너기 위해 놓은 다리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인도처럼 차도도 인간이 걸을 수 있는 단단한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공간은 인간에게 보행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위험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도심의 거리를 보는 나의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었다. 도로가 넓어질수록 인간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는 시각은 일리치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인도가 줄어드는 것과 두 다리의 사용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그렇게 두 다리의 사용가치를 깎아먹으면서 확장해 놓은 교통망이 우리를 더 빠르게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켜 ‘초고속 교통이 시간을 잡아먹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슷한 원리로 ‘의료가 병을 만들고, 교육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말하면서 문명의 이기가 원래의 존재 목적과 정 반대의 결과를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 시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풍요로워 보이는 거짓 풍요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도 원래의 사용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5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상대방에게 직접 건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말이란, 요즘처럼 우체통에 버려지는 광고전단이 아니라 마치 손으로 한 자 한 자 쓴 다음 봉해지는 편지와 같았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한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 말을 건네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이미지, 생각, 감정과 견해는 미디어를 통해 가공되고 포장되어 밤낮없이 우리의 감각을 파고든다.”
저자의 말을 듣고 보니 오늘날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나 사고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정치 슬로건과 광고문구, 예능프로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능프로에서 나오는 신조어를 더 빨리 따라하는 것을 언어적 참신성으로 착각하고 있는 현상을 생각해보라.
문자가 발명된 이래 언어의 사용 가치는 끊임없이 증가해왔다. 상업 거래를 위해 발명되었던 문자가 정교해짐에 따라 인간의 사고도 발달했고, 사고의 발달은 다시 언어의 발달을 낳았다. 언어의 기능이 최고도로 발전한 형태를 우리는 문학작품에서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와 생텍쥐페리, 윤동주와 이상, 박완서와 한강은 보편 언어의 사용가치를 드높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상 언어는 다시 퇴화하고 있다. 친구를 찾아가서 만나는 대신 전화로 이야기하고, 편지를 쓰는 대신 문자메시지로 소통하면서 언어는 정보교환을 위한 목적 이상으로 사용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게 된 이 시대는 지성의 사용가치가 더욱 떨어질 것이 자명하다. 이미 디지털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메신저로 대화를 하는 도중에 날씨 검색을 하고, 쇼핑을 할 수 있는 요즘에는 지나치게 빠른 사고전환 때문에 원래 하려던 일을 잊는 일이 흔하다. 아직은 최초에 하려던 일을 기억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경세포의 정보전달 속도가 점차 느려지면 최초에 하려던 일을 끝까지 기억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퇴화해가는 두 다리의 사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갈 거리를 걸어서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한다. 피트니스센터에 가기 위해 자동차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데는 또 석유에너지와 전기에너지가 사용된다. 기계가 인간 신체의 사용 가치를 떨어뜨리고, 떨어진 사용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시 기계를 사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언어의 사용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언어의 사용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사용 가치는 지성의 사용 가치와 같은 것이다. 글쓰기 활동이 인간 두뇌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속도가 매우 느린 사고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속노화가 화두인 시대, 디지털 기기를 덜 사용하여 사고 전환 속도를 늦추는 것도 저속노화의 한 방편일 것이다.
유사 이래 빠른 것, 더 빠른 것만을 지향해온 인류가 더 느린 것을 지향하는 시대가 되었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으로 독서와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곳곳에 공공도서관을 설립하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는가? 도서관까지 걸어가서 책을 읽고, 책을 대여하고, 집까지 걸어오면서 심신의 사용 가치를 높여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