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리뷰 2
작가라는 직업은 정말 멋지다. 특히 이 시대의 드라마 작가는 더 그렇다. 글쓰기는 혼자의 일이지만, 외로운 작업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 드라마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하는 과정은 창조성이 폭발하는 새로운 우주다.
드라마 제작의 세계를 1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 세계 사람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상상은 자유고 거기서 오는 즐거움은 공짜니 내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그렇게 완성된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도달하면 시청자의 경험과 공명하며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니 드라마는 최소 네 단계(글쓰기-촬영-편집 및 방영-시청자의 감상)를 거쳐 완성되는 셈이다. 지난번에 내가 감상자의 입장에서 쓴 글에 또 다른 감상자가 공감해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은 김에 두 번째 리뷰를 써본다.
<경도를 기다리며>가 6회까지 방영되었다. 6회 방영분에서 지우가 스무 살과 스물여덟 살에 왜 도망갔는지 그 이유가 밝혀졌다.
자기가 먼저 다가와 놓고 한 달 만에 사라진 지우 때문에 경도는 얼마나 놀라고 슬퍼했는가. 둘이 누웠던 학교 운동장에 혼자 드러누워서 울고 있는 경도를 피해 다니며 남학생들이 축구하는 장면은 우습고도 슬펐다. 세월이 흘러 스물여덟에 어른의 사랑을 시작한 둘은 한없이 행복했으나 이번에도 지우는 설명 없이 떠난다. 경도는 다시 운동장에 드러누워 추사의 <도망시>를 읊는다.
“다음 세상에는 서로가 바꿔 태어나 나는 죽고 너는 살아서 이 슬픔을 알게 하리오.”
지우의 부재는 경도에게 그녀의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죽은 사람은 산 자의 슬픔을 모를 테니 내가 죽고 너는 살아서 죽은 너를 그리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시구(詩句)를 빌어 간청하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 여기에 있다. 쓰인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시라니!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독자 자신도 이해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시라니!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또 마시던 경도는 알콜에 중독되고 치료를 위해 많은 고생을 한다. 애당초 술 마시는 것도 지우에게 배운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서른여덟이 된 경도에게 날아온 지우의 소식은 씁쓸하기만 했다.
어느 날 지우 남편의 불륜 사건이 터졌고, 신문사 연예부 차장인 경도는 이 사건을 보도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지우 남편의 상간녀가 여배우여서 사건이 연예부 소관이 된 것이다. 경도는 지우의 사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보도하는 것이 영 불편하여 밤새도록 송고 버튼을 누르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누르고 아침부터 술을 마신다. 목숨을 걸고 끊었던 술을. 하지만 지우는 경도에게 항의하기는커녕 자신의 이혼 기사를 경도가 독점 보도하도록 배려해준다.
십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에게는 예전의 감정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잘 먹고 잘 살다가 이혼까지 하고 온(지우의 대사다)’ 지우와 알콜 중독의 상처에서 간신히 벗어나 다시 열심히 일하는 경도가 이어질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우의 언니인 지연의 부탁이 경도의 발목을 잡는다. 작고한 아버지를 이어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지연은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려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이기적인 어머니와 회사에 대한 애정은 1도 없는 남편에게 회사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우가 회사에 들어와 함께 일해주길 바랬다.
‘평생 생산적인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지우 형부의 대사다)’ 사람으로 세뇌되어온 지우는 언니 말을 듣지 않고 영국으로 떠나려하는데 지연의 부탁을 받은 경도가 그녀를 붙잡는다. 경도가 지우를 붙잡는 명목은 알콜 중독을 치료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지우 편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지우 자신이 그랬듯 지우는 경도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낯설지만 서서히 경도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지우가 경도를 떠난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그동안 경도에게 이입되었던 나의 마음이 지우에게 이입되었다. 지우는 경도가 오해한 것처럼 공주병 환자가 아니었다. 스무 살에 경도가 지우에게 사 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이 돈가스였을 때 지우가 아무렇지 않게 32만2천 원 짜리 티셔츠를 경도에게 사주는 장면이 있었다. 32만 원은 지우에게는 한 끼 식사 값에 불과했지만 경도에게는 ‘엄마가 한 달을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액수’였다. 경도가 울먹이며 그 말을 하자 지우는 절망한다. 이것은 지우가 배려심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실수한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귀족으로 태어난 지우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경도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절망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잘 해준다는 것을 돈 쓰는 것과 동일시했던 지우는 자기가 돈을 쓸 때마다 경도가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지우는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8년 후, 연극 동아리 선배의 결혼식에서 경도는 지우와 해후한다. 기자가 되어있는 경도와 공부밖에는 할 게 없어 유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지우가 다시 만났다. 이때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나이였으므로 깊이 감추어 두었던 마음을 꺼내 서로에게 표현하고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사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우의 출신이 문제를 일으킨다. 경도와 동거하고 있던 지우를 찾아낸 언니 지연은 지우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며 네가 경도와 결혼하면 엄마의 멸시가 경도에게까지 갈 거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지우는 엄마가 외도하여 낳은 딸이었다. 자신의 치부였던 지우를 엄마는 한없이 미워했는데 지우는 영문도 모르고 스물여덟 해를 눈치만 보고 살아온 것이었다. 유학도 엄마의 뜻에 따른 것이었듯 후에 한 결혼도 엄마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 언니는 그것이 지우가 집안에서 입지를 다지게 돕는 일이라 생각하여 엄마에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스물여덟에도 지우는 경도를 위해 떠났던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지우의 도망 이유를 알게 된 경도는 눈물을 흘리며 지우를 안아준다.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오해가 풀리고 지우의 사랑을 확인한 경도를 나도 한없이 축하하고 싶었다.
경도가 지우를 위해 노후한 놀이공원을 통째 임대했을 때 흘러나오던 엘리 굴딩의 노래 <How long will I love you>도 경도의 서사를 반영한다. <도망시> 만큼이나 절절한 사랑의 노래다.
나는 얼마나 오래 너를 사랑할까?
너의 하늘 위에 별이 빛나는 동안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오래
나는 얼마나 오래 너를 사랑할까?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난 얼마나 오래 너와 함께할까?
바다가 모래를 적시지 않는 날까지
내가 얼마나 오래 너를 원할까?
너도 나를 원하는 동안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내가 얼마나 오래 너를 붙잡고 있을까?
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만큼 오래
네가 가능한 한 오래
내가 얼마나 오래 너에게 줄 수 있을까?
내가 너를 통해 삶을 사는 동안
네가 나의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지라도
내가 얼마나 오래 너를 그리워할까?
너의 하늘 위에 별이 빛나는 동안
그리고 가능한 한 그보다 더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