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듯한 천륜이기를
살아오며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온 것들이 있다. 공기처럼, 물처럼, 너무 익숙해 되묻지 않게 된 것들. 그중 하나가 혈연이다. 핏줄이니까, 부모니까, 가족이니까.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하리라는 믿음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 또한 금이 가고, 균열이 생기며, 무너질 수 있다.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통념을 홀로 의심할 때, 깊은 고립감이 밀려온다. 하늘의 섭리라 불리는 천륜을 스스로 끊어내는 일은, 철저히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고독한 투쟁이다. 효와 도리의 잣대 아래 배은망덕하다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어쩌면 그 낙인은, 세상이 아닌 스스로에게 새겨놓은 자책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시선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이들. 뿌리내릴 수 없는 환경에서도 꿋꿋이 생을 이어가는 삶의 방식은, 낙우송을 닮았다. 샘물 속 가장 맑고 투명한 물줄기 아래, 낙우송은 수면 밑 흙 속에 뿌리가 잠긴 채 살아간다. 겉으론 고요하고 청명하지만 새로운 호흡법으로 숨을 쉰다. 가족 안에서 흔들리면서도 위태롭게 버티는 생. 마치 뿌리째 가라앉은 낙우송처럼, 젖은 숨으로 간신히 하루를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가족이 버거워 다른 길을 고민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은 결코 혼자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며, 누구 하나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관계가 닳아 힘겨울 때는 숨 고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스스로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신을 다독이며 기다려주는 일. 그 끝이 연민일지, 회환일지, 그리움일지, 혹은 공허나 소란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이 문득 말을 걸어온다. 이제 괜찮다고. 각자의 시간을 통과한 뒤,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 다시 마주하면 된다. 어떤 마음은 끝내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을 품고, 각자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관계는 멈춰 있지 않다. 흐르고, 자라며, 낯선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혈연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멀어진 사이엔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만으로 사랑이 당연히 주어지지는 않는다. 피보다 마음이 먼저 닿아야 그 관계는 다시 살아 있는 무언가로 거듭날 수 있다. 간혹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원래의 형태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다. 마침표를 찍기로 결심했다면, 그 순간부터는 나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한다. 철저히 내 편이 되어, 나를 돌보는 데 온 마음을 써야 한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시간보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시간이 대개 더 길다. 그래서 그 부담이 벅차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엇갈린 시간과 감정의 무게를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덮기엔 현실이 너무 잔인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가끔은 부모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면 좋겠다. 자식이 감당할 무게를 헤아리고, 도리를 내세우기보다 애틋함으로 품어주신다면, 그 배려 속에서 유전적인 연결만으로는 메우지 못했던 간격에 온기가 번져갈 것이다.
거창한 필연보다 중요한 건, 관계를 유지하려는 작고 반복된 선택들이다. 핏줄은 분명 소중한 시작이지만, 그 지속은 결국 각자의 의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야 할 때다. 이 인연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안전한가, 함께 있으면 힘을 얻는가, 아니면 오히려 소진되는가. 이 질문들을 직면한 후 다음 단계로 향할 용기가 필요하다.
혈연이라는 뿌리에 사랑이 온전히 깃든 관계는 깊이 자리잡는다. 삶의 굽이마다 서로의 곁이 되어주기를. 함께하면서도 자유롭고, 떨어져 있어도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무르익어가기를. 그래서 언젠가 뿌듯한 천륜으로 다져지기를. 설령 그게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따로 또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