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당신의” 언어

by 소라비

온 가족이 잠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책을 읽었다. 제발 그만 자라고 아무리 야단을 맞아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민 온 후 한국 문화와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독서만은 놓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패드 미니로 전자책을 주로 읽는다. 밝기 조절 덕분에 이제 이불 속 신세는 면했다.

토론토에서 한국 종이책을 고집한다는 건 사치다. 서점에 가도 종류가 많지 않고, 있어도 비싸다. 정가 18,000원짜리가 세금까지 붙으면 40달러를 훌쩍 넘는다. 직구는 해외배송이 더 들고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한국 가는 친구들한테 부탁한다. 얼마 전엔 이혁진의 <광인>을 가져다 달랬는데 678페이지짜리 벽돌책일 줄은 몰랐다. 친구는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태평양을 건넜다. 미안했다.

토론토 도서관에도 한국 책은 있다. 예전에는 시내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찾아낸 책들은 전부 누렇게 바랜 고전들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벌레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발품을 팔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 도서관 웹사이트가 많이 바뀌었다. 어느 날 사이트를 뒤지다가 메뉴 하나를 발견했다.

Material in Your Language

클릭했다. 스크롤을 내렸다. Amharic, Bengali, Croatian... 40개가 넘는 언어가 알파벳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당당한 한국어.

Korean | 한국어 5,500 results
오천 오백 개의 게시물
신간도 계속 들어와 숫자가 점점 올라간다.

Your Language. 내 언어.
이 도시는 나의 모어를 "당신의” 언어라고 불러줬다. Foreign Language도 Other Language도 아니다. "당신의” 언어.
모두에게 군림하는 단 하나의 우렁찬 언어는 없었다. 40여 개 언어가 나란히 같은 무게로 놓였다.

한강을 검색해 봤다. 요새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종이는 더 누렇게 바랬고 손때가 진해졌는데, 그게 오히려 어울린다. 언어를 박탈당해 본 사람만이 아는 비밀을 꿰뚫는 작가. 한 단어 한 문장을 정성껏 집요하게 빚는다.

검색창에 채식주의자, 라고 썼다. 한국어판 12권에 예약이 11건. 적지 않은 숫자다. 대부분의 수입 도서는 타이틀당 한 권씩이다.

이번에는 The Vegetarian으로 검색했다. 112권에 예약 대기만 100건. 노벨상 직후엔 700건까지 치솟았다. e-book과 타국어 번역본까지 합치면 훨씬 많겠다.

112권이 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토론토 곳곳에서 누군가가 한국을 만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고 반납했다.

그것을 오르골의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하나의 멜로디에 헌신하는 단순하고 평화로운 기계가 되고 싶었다.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 <팍스 아토미카>

오르골.
지나가다 오르골을 보면 꼭 태엽을 돌려서 듣는다. 작은 공간 안에서 같은 멜로디만 반복하는 제한된 자유. 그게 나를 끌었나 보다. 오르골이 나를 닮았다.

화면이 아닌 종이로 책을 펼칠 때면, 실체가 없던 한국이 손에 만져지는 기분이다. 오늘은 이승우의 <목소리들>을 픽업하러 간다. 설렌다.




In Transit
예약한 책이 도심 어딘가를 가로질러 나에게 오고 있다는 메시지. 토론토의 100개가 넘는 도서관 어디에 있든, 2-3일 안에 도착해서 화면이 'Ready for Pickup'으로 바뀐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