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래나 잘하지 왜 연기를 한다고 설쳐?

‘진정한 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

by 소람

어느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던 아이돌을 기억한다. 수준 이하의 연기력에 드라마를 보는 내내 손발이 오그라들었고, 가끔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라마를 함께 보고 있던 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쟤는 노래나 잘하지 왜 연기를 한다고 설쳐?

지금은 이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실감한다. 사람은 항상 본업에 충실해야 하며, 다른 분야는 어설프게 넘봐서는 안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정신을 높게 사며, 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을 동경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자신을 한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곤 한다.


© umit, 출처 Unsplash


나도 내 안의 여러 모습 때문에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1번의 나는 조용히 에너지를 채우는 나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글을 쓰고, 가끔 독서모임에 나가는 굉장히 내향적이고 조용한 자아다. 2번의 나는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나다. 각종 뮤직 페스티벌을 섭렵하고 금요일 밤에는 주로 이태원이나 홍대 클럽에 있으며 디제잉을 하는 굉장히 활달한 자아다.


함께 글을 쓰는 친구들은 내가 디제잉을 한다고 하면 ‘네가?’하며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함께 음악을 즐기는 친구들은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역시 ‘네가?’하며 비웃음을 흘린다. 두 분야의 친구들을 한 방에 모아놓으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물과 기름처럼 자연스럽게 양 쪽으로 갈라질 것임을 안다.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양쪽을 오가면서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은 한 줄로 정의하기에 매우 복잡한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안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이라는 책에서 사람은 삶이라는 무대에서 특정한 자아를 연기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일기를 쓸 때도 완벽하게 솔직해질 수 없는 존재이며, 장소와 역할에 따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어느 정도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사람에 따라 무대와 배역은 여러 개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무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회사에서 구성원으로서의 나와 가족들 사이에서 딸로서의 나는 분명히 다르게 행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백스테이지의 조금 편안한 내 모습은 있을 수 있겠지만 애초에 ‘진정한 나’와 같은 개념은 없으며, 우리는 특정 무대 위 연기의 몰입도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 thekaleidoscope, 출처 Pixabay


그러니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다. 꼭 하나의 일관적인 모습만 가지고 살 필요는 없다. 나는 앞으로도 마음에 드는 배역이 있다면 마음껏 연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회사원1'의 나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이 있다면 조금 힘을 빼고 연기하는 요령도 피울 것이다.


나를 정말 나답게 하는 것은 ‘진정한’이라는 단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주의 이효리와 싹쓰리의 린다 G처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최대한 설치면서 살자.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배역에 몰입하자. 나는 앞으로도 글쓰기를 통해 에너지를 채우고 디제잉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유롭게 양 극단을 오가면서 살 것이다. 그때 연기력이 한참 부족했던 그 아이돌도 이제 연기를 꽤 잘하는 것을 보면 어쩐지 힘이 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