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하루는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사는 거 아닌가?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 것을 보면 아마 대충 떠오르는 답을 내놓았나 보다.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그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나도 궁금해졌다. 내 이상적인 하루의 모습이.
30대 초반인 지금,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오는 이는 없지만 나는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나의 이상적인 하루는 이른 아침 바깥공기를 마시며달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다. 끝.
하루는 24시간인데? 나머지는? 그에 대한 대답도 알고 있다. 그 뒤 일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땀을 흘리고, 튼튼한 이 두 다리로 어디든 자유롭게 달려갈 수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시작하는 하루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잘 보낼 수밖에 없으니까. 아침 달리기는 나에게 있어 하루의 첫 단추를 제대로 꿰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낯선 도시에서 달리는 재미
방콕에서 지내는 평소에도, 새로운 도시를 여행중일 때도, 다른 나라에서 길게 머무르며 재택근무를 하는 때에도, 나는 꾸준히 달린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것은 내 일상에 커다란 안정감을 주는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여행 중에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공원을 찾아다니며 달리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꼭 맛집 도장 깨기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아침운동을 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 사이에 섞여있으면 잠시나마 그 도시에 사는 느낌은 어떤지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몇 주간 재택근무를 하며 새로운 공원들을 찾아다녀보았다. 쿠알라룸푸르 한 달 살기를 계획 중인 분들. 여행 중 공원을 찾아 산책하기를 즐기는 이들. 도심 속 자연에서 힐링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쿠알라룸푸르의 공원에서 산뜻한 공기와 좋은 기운, 함께 마십시다.
경사도 많고 계단도 많은 공원이다. 한쪽에는 한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호수가, 그 반대쪽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정원을 모티브로 한 아담한 건축물들이 몇 채 자리하고 있다 (다만 유지 보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공원 전체를 한 바퀴 돌면 약 2km 정도 되는데,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곳곳에 있어 그냥 평지에서 조깅하는 것보다 꽤 더 숨이 차오른다는 변수가 있다.
Taman Rekreasi Bukit Jalil (부킷 잘릴 휴양공원) 지도
공원 남쪽에 위치한 작은 호수. 귀여운 거북이들이 헤엄을 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공원 곳곳에 심어진 가로수가 멋지다. 하지만 이런건 방콕에도 다 있지 뭐, 하며 콧방귀를 뀌어도 되는 정도다.
호수에서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는 왕도마뱀. 방콕에서 공원 좀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자태.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친 원숭이 &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원숭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사람 음식을 원숭이에게 먹이로 줘서는 안 된다고 경고 문구가 적혀있다.
이 공원의 의외의 장점은 바로 걸어서 5분 거리에 Pavillion (파빌리온) 쇼핑몰이 있다는 것. 산책 후 땀을 식히면서 갈증과 배고픔을 달래기에 최적이다. KLCC 시내에 있는 지점보다 규모가 크고 사람이 적어 훨씬 쾌적하다.
2021년 말에 오픈한 파빌리온 쇼핑몰 Bukit Jalil 지점
나는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쇼핑몰 내에 있는 오리엔탈 코피 (Oriental Kopi)에서 윤영 (밀크티와 커피를 섞은 음료), 에그타르트, 그리고 파인애플 번을 먹어치웠다. 오리엔탈 코피는 거의 모든 대형 쇼핑몰에 지점을 두고 있는 로컬 체인 음식점인데, 하루 중 어떤 시간에 그 어떤 지점을 가도 항상 사람들이 바글바글 줄을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커피, 차, 간식같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부터 락사, 나시레막 등 식사류 까지 전부 아우르는 멋진 곳. 게다가 여행 선물로도 제격인 잼이나 다과류를 예쁘게 포장해 팔기도 하니 쿠알라룸푸르에 왔다면 한 번 들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말레이시아 국립미술관과 국립극장 (Istana Budaya) 바로 위쪽에 있는 커다란 호수공원이다. 국립극장이 호수에 영롱하게 비치는 뷰는 공원의 북쪽 입구에서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놀 수 있는 조그만 워터파크도 있고,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스테이션도 마련되어 있는 알찬 공원이다.
티티왕사 호수공원 북쪽 입구에서 바라본 호수 뷰. 저 멀리 왼쪽에 페트로나스 타워도 보인다.
공원 규모가 꽤 큰데 주변이 주거 빌딩이 많은 동네가 아니라 대학, 병원, 정부청사 등이 주로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산한 느낌이 든다. 공원 전체를 크게 돌면 약 3km. 작게 호수만 한 바퀴 돌면 약 2km다. 나는 새로운 공원을 탐방할 때는 언제나 천천히 공원을 크게 한두 바퀴 돌면서 전체적인 루트를 먼저 파악하고, 달리기 좋은 길을 골라 가벼운 조깅으로 마무리한다. 티티왕사 호수공원에서는 마지막에 호수의 서쪽 둘레를 따라 한 바퀴 달렸다. 오전 8시 이후에는 그늘진 길이 많이 없어 해가 뜨거우니, 해가 뜨기 전 이른 시간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티티왕사 호수공원 지도
공원 동쪽 호숫가 전경
밤에 조명이 켜지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이렇게 예쁘고 조그만 연못도 있다.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집중해서 뭔가를 읽고 계시던 시민분. 공원이 널찍하고 한산해서 혼자 명상을 하거나 멍을 때리기에도 좋을 것 같다.
3. 퍼르마이슈리 여왕 호수공원 (Taman Tasik Permaisuri, 타만 타식 퍼르마이슈리)
쿠알라룸푸르 시내에 자리한 공원들 중 내 원픽은 망설임 없이 여기다. 공원의 남쪽은 정글처럼 하늘까지 치솟은 나무들과 열대 식물들로 무성하고, 북쪽에는 넓고 청량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숲 속에 들어온 기분과 탁 트인 호수의 광활함을 둘 다 느낄 수 있어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설렘을 주체할 수 없는 공원이다.
공원 안에 있을 뿐인데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규모에 감탄했다. 오른쪽에는 기공 체조를 하고 계시던 시민.
바로 위에 소개한 티티왕사 호수공원에 비해 주변에 주거 건물들이 많아 아침운동을 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로 붐빈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과 마주치면 "굿모닝", "조우산" (광둥어 아침인사)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정겹고 좋다.
호수 뒤로 보이는 주거 건물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도 울창한 나무들 덕에 그늘이 많아 운동하기에 선선하고, 풀냄새가 은은하게 퍼져있는 공기도 너무나 달달하다. 숲길을 거닐 땐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신성하게 내리쬔다.
"우와" 소리가 연달아 나오던 아침 햇살 빛줄기.
아무리 운동이 중요해도, 이런 신성한 뷰는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인지상정
삼삼오오 모여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로 공원 전체가 붐볐다.
공원 곳곳에서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호수 안에 가득한 물고기들, 보통 공원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새들 (무슨 새인지 아시는 분 계시다면 제보 바랍니다.), 그리고 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는 거북이들까지 만나볼 수 있다.
물 반 고기 반 - 호수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
공원 북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는 흰색의 무언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다름아닌 새였다. 다들 누구세요..? 그리고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잘 움직이지도 않아서 모형인지 아닌지 한참을 쳐다봤다. 방콕 촌놈에게 아주 진귀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거북이 가족이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너무 귀여운 광경이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퍼르마이슈리 공원은 크게 한 바퀴 돌면 3km, 호수만 빙 둘러 돌면 약 1.3km다. 이번에도 역시 몸도 풀고 공원 지리도 파악할 겸 먼저 공원 전체를 크게 한 바퀴 돈 뒤에 호수만 빙 둘러 두 바퀴 달리는 것으로 아침 산책을 마무리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공원들 중 딱 한 군데만 다시 갈 수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공원을 고르겠다.
KLCC 공원은 아마도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 안 해본 것들을 찾아다니기 좋아하는 나에게 숙소 앞 3분 거리에 위치한 이 공원은 자꾸만 그 소중함을 잊게 되는 곳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놀라움은 덜할 수 있으나, 도심 한가운데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또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인 페트로나스 타워를 바라보며 달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운동을 마치고 바로 근처 아무 쇼핑몰에나 들어가 커피 한잔 들이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늠름한 페트로나스 타워 뷰
매일 아침 걷고 달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트로나스 타워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공원 전체를 크게 한 바퀴 돌면 약 1.2km. 네 바퀴를 돌고 나면 딱 5km를 찍을 수 있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한 바퀴에 언덕진 곳이 서너 군데 있어 그냥 평지를 달릴 때 보다 더 힘이 든다.
왼쪽: 5km 30분 컷으로 달리고 시작했던 아침 / 오른쪽: 공원 지도
공원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좀 더 숲 속에 들어온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수영장도 있다. 햇살이 비출 때 이렇게 탁 트인 공원 뷰가 너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