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ㅣ그냥 좀 무뎌지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덧 나의 세상을 잠식해 버린 술

by 건빵진소라

고백하자면 지난 브런치북을 연재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가 버겁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맛도 좋고 영양가도 만점인 글을 선보이고 싶었지만 자꾸만 내 글이 어딘가 초라해 보여서 글을 쓰는 맛이 뚝 떨어졌달까. 본질적인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궁극의 레시피를 찾아내겠다며 노력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읽는 이에게도 쓰는 이에게도 글의 맛이 떨어져 버린 것은 당연한 순리였을 테다. 그래서 한동안은 글쓰기를 멀리하고 싶었다. 그래, 그랬는데 어째서 지금 새로운 브런치북의 프롤로그를 적고 있는 거냐고 한다면.

글로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이런 말을 하려니 영 쑥스럽지만 글을 쓰지 않으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들이 밀려왔다. 우선 혼자 술을 마시는 나름대로의 거창한 명분이 없어진 탓에 술 마시는 내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떳떳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동안에는 글을 쓸 때면 늘 “나의 창의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어김없이 술을 한잔씩 홀짝이며 글을 썼는데 글 쓰는 행위가 빠진 혼술 행위는 어딘가 많이 허전하고 또 한심스러웠다. (물론 이때의 “한잔”은 관용적인 표현이다. 한잔에서 끝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기서 술이 창의력을 극대화시킨다는 지독한 명분은 나의 감각에서 기인한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힌다. 또 다른 부작용은 이럼에도 저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꿋꿋하게 챙겨 마셨다는 것인데 흥미로운 지점은 술을 마시는 빈도와 마시는 술의 양이 짧은 기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미 다수의 목격자가 빈 맥주캔과 와인병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을 알아차려버렸다. 뭐, 한번 마실 때 혼자서 500ml 용량의 캔맥주를 5캔 이상 마셔댄다거나 2병 이상의 화이트 와인을 때려 붓는 걸 보면 적지 않게 마시고 있다는 게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시고 있으니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마지막 부작용은 이번 연재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인데 바로 어제부터 가슴 안쪽이 답답하고 뻐근한 증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미 10여 년 전쯤에 비슷한 증상을 겪은 나는 편향적인 시선으로 이것을 “결혼한 지 40년 된 엄마들이 가질 법한 화병”이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내가 그동안 글쓰기를 통해 상당 부분 마음의 찌꺼기를 정화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브런치북의 제목처럼 지금의 나는 맨 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적인 표현에서 그치면 좋았을 텐데 실제로 우울증 약에 기대거나 술이 주는 취기에 기대거나 그 어떠한 것에든 기대야만 간신히 살 수 있는 것이 지금의 내 상태다. 생각해 보면 널뛰는 감정에 지칠 대로 지쳐버려서 그냥 조금 무뎌지고 싶다는 생각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던 것뿐인데 알코올 의존, 아니 알코올 중독의 지경에 이르다 보니 모종의 변화 내지는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던 찰나에 글쓰기가 다시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내가 왜 이토록 달콤하면서도 파괴적인 술에 집착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들고 싶어졌다. 아마 지난 세월 동안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겪었던 숭고한 치유의 과정을 또 한 번 경건하게 맞이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깃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의 연재는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나에게 스스로 보내는 격려와 위로의 글들로 그득하게 채우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미리 밝히며 연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