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ri May 07. 2023

공감각을 동원한 기억

음악이, 피아노가 주는 신묘한 순간들

 나에게 피아노는 여러모로 묘하다. 어렸을 때 피아노는 떠올리기만 해도 싫은, 건반 앞에 앉기 싫은, 마주하기 싫은 대상이었다. 아직도 생각난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내 방 앞에 놓인 피아노 앞에 울면서 앉았고 혼나면서 악보를 읽었다. 흥얼거리며 들었던 가요를 얼렁뚱땅 피아노로 치면 박수를 쳐주던 이웃들,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이 즐거워했던 나. 내 방에 놓인 피아노는 그랬다. 정말 치기 싫었지만, 한 번씩 어깨 으쓱하게 만들어줬던 그런 이중적인 악기.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 학원에 처음 갔을 때 마주했던 낯섦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분명 내 방안에선,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었는데 모두의 앞에서 레슨을 받던 나는 그냥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패배감이라는 감정 때문에 어렸을 때 그렇게 피아노를 싫어했던 건 아닐까 싶다.

  모든 감정들엔 피아노가, 피아노를 치던 공간이, 피아노를 쳤던 이야기가 있었다. 오감을 모두 동원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물이 각자 하나씩 있는 것처럼, 나에겐  대상이 돌이켜보니 피아노였다.  방에 놓인 낡고 작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보면 온갖 감정이 교차한다. 나에게 있어 피아노는 단순히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매개체를 넘어  인생을 함께 걸어온 동반자가  것이다.  힘을 다해 피아노를 미워했지만 결국 돌고 돌아 피아노를 찾게 되었고,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다. 참으로 악기가, 그리고  나아가 음악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어린 시절 피아노 앞에서 영혼 없이 사과를 지워가며 치던 하농,  높은 번호를 향해 진도 빼기에만 바빴던 체르니, 아주 작은 콩쿠르에서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백지장이 되어 엉망징창으로 치고 내려왔던 모차르트 소나타까지. 모든 것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지나간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스케일. 항상 빼놓지 않는 피아노 연습의 루틴이다.

 

그때 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엄마가 혼내지 않았는데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학원을 간다. 도착해 들어간 피아노 연습실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하농을 연습한다. 메트로놈을 켜고 팔에 최대한 힘을 빼는 대신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도록 손가락 모양을 보며 쳐내려 간다. 이 모든 걸 어렸을 때부터 했더라면, 이라는 후회가 들지만. 뭐 어쩌겠어. 어렸을 때의 나는 그렇게 치기 싫었던 걸. 지금에라도 손가락 모양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농을 치고, 또 친다. 이렇게 치다 보면 내가 치고 싶은 곡들을 언젠가 칠 수 있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감, 그리고 조금 더 연주답게 들리고 싶은 욕심을 담아 계속 그렇게 연습을 해간다.


 가끔,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의 리사이틀 그리고 협연을 갔다 오면 그들이 쳤던 곡들이 너무나 입체적으로 기억된다. 리사이틀에 들어가기 전에 먹었던 저녁, 책자를 읽으며 쿵쾅거리던 설렘, 건반 위에 올려진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너무나 생생한 피아니스트의 표정, 찰나의 핸드폰 벨소리,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박수갈채와 환호, 아드레날린 분비 최고조에 다다른 상기된 내 감정까지. 음악 하나에 순간의 기억들이 다 구슬 꿰매어지듯 잘 얽혀있는 것이다. 여전히 잊히지 않은 강렬한 기억은, 연대 노천극장에서 흘러나왔던 조성진의 앙코르, 드비쉬의 달빛. 관객들을 달래주고 위로해 주었던 그 청아하고 아름다웠던 연주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가끔 짜증 나고, 우울할 땐 조성진의 달빛을 틀고 잠시 눈을 감아 그때의 노천극장으로 돌아간다. 왜인지 조금이나마 더 위로가 된다. 그때의 감정이,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아서겠지. 그래서 드비쉬 달빛을 연습하고 있고, 드비쉬 달빛 레슨을 나가는 동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기억이 공감각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 소중한 감정을 더 오래도록 기록하기 위해. 더 나아가 피아노를 치는 이 시간들을 더 소중하게 기록하기 위해서다. 마음을 다잡고 오래도록 꾸준히 글을 써 내려가겠다는 또 한 번의 다짐을 하며, 이 다짐이 깨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써보아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