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김승섭 / 난다
방과 후 아이는 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습니다" 외치고 가방을 신발장에 놓고 뛰쳐나간다. 두 손에는 바람을 적당하게 넣은 축구공이 들려있다. 친구들과 내편, 네 편 가르고 축구를 한다. 내편이 골을 넣으면 골 세리머니에 동참한다. 상대편이 골을 넣으면 숨이 멎는 아쉬움을 토해낸다. 놀이가 끝나면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고, 아찔한 순간들의 수다가 이어진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편 가르며 하는 놀이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은 아이들이 축구 경기가 끝난 후 어깨동무를 하고 나누는 공감의 눈으로 봐야 한다. 편 가르기 할 게 따로 있지.
한 지인이 트라우마에 대한 경험을 얘기했다. 20년 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폭행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트라우마로 밤길 혼자 걸을 때 몸을 바짝 긴장하며 다닌다고 한다. 모두들 그녀의 트라우마에 공감하고 걱정했다. 평생 내가 발 닿는 곳이 나를 공격할 것 같은 긴장감으로 사는 지인을 보며 생각한다. 개개인의 고통의 크기를 저울질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에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겠다고. 내가 외면하고 사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이슈가 되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 잠깐의 공감을 하고 끝까지 쫓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건의 진실을 보려는 노력보다 언론에서 보여준 그대로 필터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천안함 사건은 2010년 3월 26일 9시 22분 서해바다 폭침으로 46명이 순직하고, 58명이 생존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해 뉴스만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일상을 편편하게 살아가는 내가 부끄럽다. 나는 아마도 104명의 장병들이 국가유공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끔찍한 사건을 두고 국가유공자의 당연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당연함의 보상으로 내가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짐을 상쇄시키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46명의 순직한 장병들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누구도 그 사건에 있던 생존 장병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적 고립을 겪을 때 신체적 통증을 느낄 때와 동일한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p103
사회적 고립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한 몸에 갖고 사는 생존 장병들을 생각한다. 창밖으로 화사한 봄날로 마음이 부풀었다가 금세 바람 빠진 축구공이 된다. 이렇게 눈부신 봄을 스무 살의 어느 날부터 온전히 다 가질 수 없었을 생존 장병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저린다.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김승섭 교수가 '2018년 <천안함 생존 장병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천안함 사건 생존 장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망한 장병도, 생존 장병도 폭침으로 갈기갈기 찢긴 배 안에서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2010년 3월 26일은 자신의 근무지를 잃고 같이 생활한 전우를 잃은 날이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사망한 전우의 시신을 감별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2002년 제2 연평 해전에서 생존한 장병들은 침몰한 배도 청소했다면서 다행인 줄 알라는 소리를 들었다. 동료의 유품을 찾으러 그 끔찍한 사건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국군수도병원에서 밤늦게까지 조사를 하고, 사고 2주 후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치료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전역 후 비용은 자비로 했다. 때마다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만이 지나쳐갔다. 평생 트라우마를 갖고 패잔병의 낙인, 전역 후 음모론과 악성 댓글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내가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우를 어느 한 명의 장병도 순조롭게 받지 못했다. 패잔병이라는 낙인을 갖고 국가를 상대로 힘들게 싸워야 했고, 이마저도 모르는 장병들도 있었다.
저자는 또 천안함 사건을 얘기하면서 진영 논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세월호 사건을 같이 언급한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두고서는 보수 진영의 목소리를 높였고 2014년의 세월호 참사를 두고서는 진보진영이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보수와 진보 정치로 구분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트라우마 생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며 상대 진영이라 여겨지는 피해자의 고통을 조롱하는 진영 논리의 폭력성과 편향적 사고가 만연했던 사건이라고 말한다. (P137)
타인의 고통을 두고 진영논리로만 공감이 흐른다는 것에 마음속에서 화가 올라온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에 반짝 천안함과 세월호를 이용하듯이 나도 선거철에만 귓등으로 흘리고 말았다. 이런 나의 말이 먹힐 리 만무하지만 이제라도 함께 하자고 말하고 싶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보내고 있을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가슴에 맺혔을 응어리를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 제목인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피우진 중령이 유방암 수술을 받아 유방을 제거했다는 이유로 실제 업무 수행 능력과 무관하게 심신 장애로 강제 전역을 통보받고 복직 소송에서 승소한 고통스러운 싸움을 쓴 기사의 표현에서 따왔다. 사건이 나올 때마다 한 턱 한 턱 넘어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인다. 국가를 지키는 노동을 한 사람으로 노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산업재해로, 다친 군인에게 상이 연금과 국가유공자 등록은 그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최소한의 것의 벽이 십 년 보다 더 높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가는 이 고단한 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심했던 나를 돌아보고 무지에서 벗어나 알려고 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다. 누가 될지 모르는 미래의 피해자들을 위한 그 걸음에 공감하고 알리는데 보태고 싶다.
김승섭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워싱턴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했으며, 2013년부터 현재까지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와 동 대학원 보건과학과에서 부교수로 일하고 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고려대학교 최우수 강의상인 석탑강의상을, 2018년에는 최우수 연구상인 석탑연구상을 수상했다.
천안소년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한 이후, 재소자 인권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구금시설 건강권 실태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역학자로서, 차별경험과 고용불안 같은 사회적 요인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4년 ‘인턴.레지던트 근무환경 연구’, 2015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국가인권위원회의 ‘소방공무원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6년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세월호 특조위의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2017년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 2018년 ‘천안함 생존자 건강 연구’, ‘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연구’를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다. 현재 한국 성소수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레인보우커넥션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으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 동성결혼 소송,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 소송, 군형법 위헌 소송에서 법정 증언을 하거나 전문가 소견서를 제출하며 참여한 바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오롯한 당신』(공저)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