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이지만, 나도 잘 하는 게 있었어
계약직으로서 불안한 마음을 안고 약 3개월 정도 회사를 다녔을 즈음, 팀원들과 상위 부처 보고회에 가는 길에 여의도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맛집을 잘 알던 팀장님께서는 근처에 맛있는 와플집이 있다고 하여 팀원들을 와플가게에 데려갔다.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소규모 가게였지만 달콤하고 고소한 와플냄새 덕인지 줄이 꽤나 길었다. 우리 차례가 되었을 즈음, 딱 봐도 서양 사람인 가게 사장님은 내게 영어로 인사를 했고,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나는 사장님의 영어 악센트를 듣자마자 그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Bonjour, dix gaufres, s'il vous plaît" (안녕하세요. 와플 10개 주세요)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내게 프랑스어권의 사람들과 불어로 대화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별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사장님은 예기치 못한 불어를 듣고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Vous parlez français?" (프랑스어 할 줄 알아요?)
"Oui, je parles français" (네, 프랑스어 해요.)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꽤나 흔치 않은지 사장님은 놀람과 동시에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리고 주문한 와플이 준비되기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장님은 벨기에 출신이며, 벨기에의 브뤼헤(Bruges)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벨기에의 맛있는 음식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이미 벨기에에 다녀온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님의 생동감 넘치는 고향 소개는 다시금 벨기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게 약 10분이 흘렀을 즈음, 주문한 와플이 준비되었고 사장님과 짧지만 즐거웠던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자리를 뜨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런데 웬걸, 뒤에 있던 팀원들의 눈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프랑스어 왜 이렇게 잘 해요?', '영어도 잘 하지 않아요? 근데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아요?', '와.. 엄청 유창하던데 너무 깜짝 놀랐어요. 완전 인재네.'
내가 프랑스어로 원어민과 대화한 게 꽤나 충격적인지 팀원들은 차에 타서도 끊임없이 내게 칭찬을 했다. 별거 아닌데⋯. 뜻밖의 칭찬 세례에 겸연쩍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인정을 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계약직 신분으로 근무하며 인정 욕구로 갈증이 났던 것들이 꽤나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도 잘 하는 게 있었지.
예기치 않게 와플집에서 프랑스어로 대화한 일을 계기로 나는, '외국어 잘하는 직원'으로 회사에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계약직이었지만 성실함과 외국어능력과 같은 자질들이 회사생활 하는 동안 우연히 드러났고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해외사업팀 정규직 대리가 된 현재의 나를 만들어냈던 것 같다.
와플가게 일화는 당시엔 정규직이 아닌 나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던 나날들의 하루였지만,
돌이켜 보건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