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by 소로소로


둘째가 다니는 유치원 원장님께서는 영어를 너무 사랑하신다. 원장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어채널이 항상 틀어져있고(원장님이 없을 때조차 나오고 있음) 필리핀 원어민교사가 2명이나 계셔서 오전 오후 놀이영어를 해주시고 중간중간 반을 돌면서 도우미선생님 역할을 해주신다. 원비가 너무 저렴해서(7세는 4만 원 납부) 이게 가능한가 밥을 부실하게 주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둘째가 쌀밥이 너무 쫀쫀하고 맛있어 2번이나 먹고 온다는 말에 걱정이 민망함으로 변했다.




영어선생님 맡은 파트가 다른데 아이린선생님은 영어를 이론적으로 더 잘 가르치고 줄리선생님은 놀이영어 방식이라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고 원장님 칭찬이 자자했다. 영어라면 뭐라도 조금씩 노출해 주자 학원을 보낼 나이도 아니고 집에서 내가 가르쳐 준다는 건 더욱이 어려웠으니 이론이던 놀이던 뭐든 감사합니다 싶었다.



등원 차량에 줄리선생님이 탑승해서 지도해 주면서 딸아이를 더 예뻐했다. 아가씨인 줄 알았던 선생님은 5학년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다면서 무뚝뚝한 아들을 보고 있다가 아기 같은 딸 보고 있자니 사랑스럽고 모든 게 다 귀엽다고 했다. 아하 5학년 5 춘기가 시작되는 나이니까 무서울 법도 하고 타국에서 이리저리 적응하기 힘들 텐데 안쓰러웠다. 저 멀리서 걸어오시길래 깜짝 놀라 물어보니 집 근처에 살고 있다면서 걸어와서 아침에 같이 타고 가신다고 했다.




혹시 어떻게 유치원에 오시게 되었냐는 말을 하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코로나 전에는 필리핀에서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업을 했었는데 중단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생활하신다고 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가실 거냐고 물어보니 한국이 덥지도 않고 치안도 너무 좋아서 가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좋았다. 가끔은 남자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듣는다고 소로소로 딸은 말도 잘 듣고 영어도 좋아해서 힘이 안 든다는 칭찬도 해주셨다. 영어를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시니 입에서 저희 아이 따로 과외해 달라는 말이 맴돌았는데 차마 하지 못했다. 눈치는 있구나 싶다.



2년을 함께했던 줄리선생님이 갑자기 필리핀으로 들어가신다고 한다. 한국이 너무 좋다고 다시 필리핀을 안 간다고 하셨는데 너무 아쉬웠다. 딸아이는 울고 가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 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급작스럽게 떠나셨다. 나중에 들은 건 한국에 있는 아들이 내년이면 6학년이고 영어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기서 엄마 말을 안 듣는 아들이라 집에서 못 가르친다며 강제소환처럼 필리핀으로 3년 영어 공부를 하고 중2쯤 온다고 했다.



그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보내기 싫은 마음을 거두고 한국에 없는 선생님께 그동안 감사했다고 딸아이가 섭섭해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현지 상황 때문인지 답장을 받지 못하고 그냥 잘 계신다는 이야기만 유치원 선생님께 전해 듣고 아쉬움을 달랬다. 매일아침 인사하며 나눴던 그동안 대화로 나도 정이 들었구나 짧은 인연이지만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시간이 흘러 6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그것도 내 생일날 아침 제일 먼저 카톡으로 말이다. 영알못 엄마이지만 간단한 영어에 마음이 샤라락 내려앉았다. 나의 마음을 전했더니 마지막 답장에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친절히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 두줄이 왜 이렇게 가슴을 울렸을까 한국에서 필리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녹녹지 않았을 거라 생각된다. 겉으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선생님이던 아니던 사람으로 대우해줘야 하는데 아직은 그것이 많이 부족하기에 그녀가 나에게 느낀 감정이 좋았다는 게 오히려 더 감사했다. 나눠준 것은 짧은 대화뿐이었지만 어쩌면 그녀도 많은 것을 바랐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 생활 중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축복받았다는 줄리선생님 앞길에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힘들어도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인 자에게만
세상의 모든 운이 웃으며 달려가 안긴다.


김종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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